▶ 존 낙스 ‘기도와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이 백만대군보다 강하다’설교
▶ 1561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 조직. 신앙고백서를 국가의 신조 채택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지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즈 성당.
오늘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Scotland)의 해딩턴, 스털링, 에딘버러에서 존 낙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신앙유산을 찾아가 본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년)는 로마 가톨릭의 신부였으나 칼빈주의를 추종하면서 로마 가톨릭 신도인 메리 1세(본명은 Mary Stuart) 여왕과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투쟁하여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켰다.
개혁 신학의 기초를 존 칼빈이 세웠다면 장로교의 영성과 목회적 기초는 존 낙스에 의해 세워졌다.
존 낙스는 에딘버러와 가까운 해딩턴(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 후 해딩턴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 Church, 주소: Sidegate, Haddington EH41 4BZ)에서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를 만나 회심한다.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결연하게 설교하던 위샤트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위샤트가 순교를 당하자 그를 이어 개혁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 세인트 메리교회 안쪽에서 넌게이트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넌 후 오른편 기퍼드 게이트(Gifford Gate)를 따라가면 왼편에 낙스의 생가 터가 나온다.
길에는 아무런 간판도 없지만 철제문 건너 큰 참나무(고 토머스 칼라일의 유지에 따라 심겨진 나무) 아래에 ‘존 낙스가 1505년에 태어난 집터’를 증명하는 비석이 있다.
에딘버러 마켓광장에 있는 언약도 순교를 기리는 명판
낙스는 종교개혁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피난하여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에서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는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하며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전체를 새로 번역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이다.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1559년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능력이 넘쳤으며,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등장한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으로 유명한 스털링의 홀리루드 교회(Church of the Holy Rude, 주소: St John Street, Stirling FK8 1ED)는 낙스의 일생에 있어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를 했던 곳이다.
시편80편 4-8절을 본문으로한 “기도와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이 밀려오는 저 백만 대군보다 강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그의 설교는 프랑스군의 진격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절망적인 순간에 처하게 됐을 때 힘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세인트 자일즈 성당 주차장에 낙스가 묻힌곳을 표시해 놨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상황은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졌으며,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구원의 필수조건이고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위클리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유포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런 암울하고 타락한 시대에 메리 여왕에 맞선 낙스의 종교개혁은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즈 성당(St. Giles Cathedral, 주소: St. Giles Cathedral, Edinburgh, EH1 1RE)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매주일 낙스의 설교는 수천 명의 청중을 사로잡았고 회중들은 성경적인 개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스코틀랜드에 영적 대각성 운동과 부흥이 일어났다.
1560년 8월,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의 날이 찾아왔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관할권을 폐지했으며 교회에서의 미사 집전을 금지했다.
낙스는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를 만들었다.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그 신앙고백서를 국가의 신조로 채택했고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으로 삼았다 (1638년에 그 신앙고백서에 따르기로 서약했던 무리를 ‘언약도’라 한다).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Presbyterianism) 총회를 조직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훗날에 언약도들은 엄청난 박해를 당했는데, 에딘버러의 마켓광장에서 140명의 언약도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차례로 순교를 당했다. 그곳에는 “많은 순교자들과 언약도들이 이곳에서 개혁신앙을 위해 죽었다”는 글과 함께 순교한 언약도를 기리는 원형 명판이 있다.
낙스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주시든가 아니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메리 여왕조차도 그의 기도를 두려하면서 “백만 군사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고백했다.
1570년, 낙스는 넓은 세인트 자일즈 교회에서 더 이상 기력이 없어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자 장소를 근처의 톨부스 교회(Tolbooth Kirk)로 옮겼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은 페스티벌 센터가 되었고, 어떤 교회는 심지어 시장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그의 자택인 존 낙스 하우스(John Knox House, 주소: 43~45 High Street, Edinburgh EH1 1SR)에서 숨을 거두었다.
존 낙스가 숨을 거둔 에딘버러의 존 낙스하우스
그는 아내에게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달라 부탁하여 말씀을 들으면서 잠들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 남겨질 양 떼(제자)를 걱정(요 17:11)하는 낙스의 마음이 느껴졌다.
세인트 자일즈 성당 뒤편 주차장 23번의 네모난 표시가 바로 존 낙스의 무덤이다. 칼빈은 자신의 무덤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이름의 약자인 J.C만 써 달라고 했는데 낙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름조차 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
칼빈과 낙스는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했고, 죽는 그 순간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칼빈과 낙스의 말과 가르침을 추종하며 따르는 후예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겸손하고 희생적인 삶도 따르고 있는지를 뒤돌아본 여정이었다. <계속>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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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환 목사 (세계선교침례교회 담임, 게이트웨이신대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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