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일보 거북이마라톤 대회는 좀 색달랐다. 한 애국단체 회원이 자발적으로 정식규격의 의전용 태극기를 들고 와 선두에 섰고,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역시 대형 태극기를 함께 들고 뒤를 따랐다. 손 태극기를 흔들며 걷는 꼬마들도 있었다. 그날 참가자 300여 명 중 대부분이 태극기 등장에 무관심했지만 연도의 일부 미국인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내게는 그날 태극기가 당연시 됐다. 예나 지금이나 각종 행사의 필수순서인 국기배례가 몸에 밴 탓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가 티격태격하다가 국기하강식 경보에 벌떡 일어나 나란히 배례하는 장면이 눈에 설지 않았다. 나도 군대시절 매일 국기하강식 때 애국가 연주가 끝나도록 말뚝처럼 서서(식사 도중에도)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했었기 때문이다.
생애의 절반을 독재정부 아니면 군사 전제정권 통치하에서 살면서 길들여졌는지 나는 태극기에 애착하는 편이다. 소위 보수파이다. 대형 호텔에 나부끼는 만국기 중 일장기가 있는데 태극기가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지난 2012년 국회에서 국민의례 도중 애국가 제창을 거부해 논란을 일으킨 ‘종북’ 국회의원 이석기가 괘씸하고 한심해 보였다.
똑같은 감정을 꼭 1년 전에도 느꼈다. 프로풋볼(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의 흑인 쿼터백 콜린 캐퍼닉스가 프리시즌 게임 시작 전 국가연주 중 동료선수들이 서서 성조기를 향해 배례하는 동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경찰의 과잉폭력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국기를 외면한 그의 행동이 매우 괘씸했다.
금년시즌 들어 캐퍼닉스에 동조하는 선수들이 늘어나자 일부 팬들이 “(정치는 그만두고) 경기에나 전념하라”며 비아냥했다. 나는 속으로 맞장구쳤다. 하지만 곧 이어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나 생각이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주말 느닷없이 “성조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개새끼 같은 풋볼선수들을 경기장에서 추방하라”고 역정을 내며 참견했다.
대통령이 대중집회에서 (남의 말처럼이라도) ‘개새끼(son of bitch)’라는 쌍욕을 입에 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트럼프는 그 후에도 무릎 꿇는 선수들을 거의 매일 공격했다. TV 풋볼경기 중계 시청률이 이미 떨어졌고, 앞으로도 선수들이 계속 무릎을 꿇으면 NFL 구단주들은 결국 망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TV 시청률이 실제로는 작년 동기보다 3% 늘어났다.
이제 선수들은 트럼프에게 “(스포츠는 참견 말고) 정치나 제대로 하라”고 비아냥한다. 자기들이 국가연주 동안 무릎을 꿇는 것은 “국기와 국가를 모욕하는 비애국적 작태가 아니며 평등하고 정의로운 미국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 권리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구단주와 코치들도 이들이 자랑스럽다며 기꺼이 함께 무릎을 꿇는다.
트럼프는 NFL에 구원이 있다. 그는 1982년 NFL에 맞서 발족한 USFL의 뉴저지 제너럴스 팀을 매입했다. 당초 NFL을 피해 봄철 시즌을 택했지만 트럼프가 우겨 가을철로 옮겼다. 방송사들이 NFL 경기만 중계하자 그는 내심 NFL과 합병을 노리고 독점금지법을 들어 제소했다. 재판에선 이겼지만 NFL 보상금은 단돈 3달러였고, USFL은 3년 만에 망했다.
국가연주 중 꿇어앉은 선수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농구선수 마무드 압둘-라프는 1990년, 야구선수 카를로스 델가도는 2004년 각각 종교와 이라크 전 반대를 내세워 꿇어앉았다. 흑인 육상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라스는 1968년 올림픽 시상대에서 인권평등을 외치며 주먹을 치켜 올렸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7년 종교를 이유로 월남전 징집을 거부했다.
2주 전 주말 NFL 경기에서 200여명의 선수가 국가연주 중 무릎을 꿇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망언’을 계속하면 항의하는 동참자들이 더욱 늘어난다고 했다. 트럼프는 어쨌든 국가연주 중 무릎 꿇기는 용납 못한다고 맞선다. 트럼프의 막말이 싫은 나는 선수들 편이지만 경기장에서 단체로 무릎 꿇는 모습은 여전히 보기가 민망하다. ‘꼴통보수’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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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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