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의료진과 병원, 보험사를 대표하는 그룹 등, 의료계 전체가 이례적으로 그래함-캐시디 건강보험법안을 비난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서한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공개선언문의 스타일에 맞춰 쓰여졌다. ‘우리는 동의한다’로 시작하는 일련의 구절 중 각 문장의 첫 단어를 볼드체로 쓴 서한은 그래함-캐시디 법안이 병력자들에게 가할 해악에서부터 보험시장에 초래할 혼란에 이르기까지, 상원에 계류 중인 공화당 의료법안의 악성 조항들을 일일이 지적했다.
완고하다고 할 정도로 매사에 신중한 의료계로부터 이처럼 유려한 서한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낼 정도라면 그래함-캐시디 의료보험안이 정말 형편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공화당은 어쩌다 이토록 형편없는 법안을 들고 나오게 됐으며, 이토록 참담한 법안이 어떻게 법제화의 목전까지 갈 수 있었을까? 실제로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의 반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이 법제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화당이 지난 수년간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았다는데서 찾아야 한다. 지금 공화당은 비단 의료법안 문제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자신들의 늘어놓은 거짓말의 덫에 갇혀 버렸고 이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제안한 법안의 처리를 강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였다.
공화당이 그래함-캐시디 법안을 밀고 나가는 이유를 다룬 언론 보도는 많은 공화당의원들이 구체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법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지의사를 밝히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이오와 출신의 척 그래슬리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 법안을 상원에서 다루지 말아야 할 10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공화당이 오바마케이의 폐기와 대체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해왔기 때문에 약속을 이행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뉴욕타임스의 칼 헐스 기자는 여기에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공화당이 그래함-캐시디 법안을 밀어붙이는 한 가지 주요 요인은 기부자들 사이의 분노다. 이들은 공화당이 무슨 연유에서 오바마케어를 폐기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깼는지 알기 원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오바마케어로 알려진 전국민의료보험(ACA) 폐기만을 약속한 것이 아니다; 전국민의료보험을 폐기한 후 새로운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서도 소비자들이 싫어하는 일부 ACA 조항들을 없애고, 더 싸고 질 좋은 보험으로 이를 대체하겠다고 약속했다.
경비로 인해 의료보험가입을 거부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 즉 ‘지미 키멜 테스트’를 들고나온 사람은 방송 토크쇼 사회자인 지미 키멜이 아니라 빌 캐시디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나 공화당은 약속을 이행하고 검증시험을 충족시킬 방법을 몰랐고 수백만명의 미국인들로부터 의료보험을 빼앗지 않으면서 ACA를 폐기하는 방법 역시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헬스케어에 관해 줄곧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공화당의 풀뿌리 지지자들과 거액 기부자들은 그들의 거짓말을 믿었고 결국 공화당 의원들은 꼼짝없이 그들이 설치한 거짓말의 덫 안에 갇히고 말았다.
거짓말이 되돌아와 거짓말쟁이를 깨문 이슈는 헬스케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이 직면한 거의 모든 묵직한 정책안에도 어김없이 동일한 현상이 발생했다.
공화당 아젠다에서 헬스케어 다음으로 큰 아이템은 세금이다. 현재로선 기업과 부유층 세금감면이 3,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로부터 의료보험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비교적 쉬운 정치적 과제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 동안 재정책임을 강조하는 정당 행세를 해온데다, 예산적자를 부풀리지 않고 감세를 단행할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화당은 여전히 문제를 갖고 있다.
헬스케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은 참신한 아이디어의 부족을 거짓말로 가린 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세제상의 허점과 예산낭비를 제거함으로써 세율인하를 상쇄하고 적자까지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헬스케어와 마찬가지로 이런 거짓말은 실제 법안이 공개되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감세가 경제성장을 부추겨 필요한 예산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것이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세제개편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화당이 벌써부터 무당 경제학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일러준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그들을 믿는 유권자들은 별로 없다. 부시의 감세가 경제 붐을 일으키지 못했고 캔자스주의 감세 ‘실험’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와 반대로 미국 경제는 오바마 대통령이 증세를 단행한 2013년 이후 제대로 굴러가고 있고, 캘리포니아 경제도 제리 브라운 주지사가 세금을 인상한 이후 성장을 이루었다.
공화당 기관원들은 레이건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광란의 축제에 몰두하고 있으나 광범위한 대중은 세금감면이 36년 전처럼 마법과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는 주장에 꿈쩍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세금정책도 헬스케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의 유산에 발목이 잡혀 절뚝거리고 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외교정책은 대체로 유권자들의 핵심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도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의 거짓말로 이란 핵합의와 같은 문제에서 박스 안에 갇혀있다: 이란과의 핵합의를 파기하는 것은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내지만, 그대로 놓아두면 트럼프 행정부의 비난이 부정직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공화당은 조만간 기후변화와 관련해 거짓말을 한 대가를 치루기 시작할 것이다. 기상학자들의 전망대로 허리케인의 위력이 점점 더 강력해지면서 기후변화 부인은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자금 기부자들을 비롯한 공화당 지지기반은 기후변화위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약간이라도 인정할라치면 분노 섞인 반응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냉소주의 법안은 이제 시효 만기가 되어가고 있다. 수년간 완전한 거짓말 정책이 공화당에 기여했고 그들이 의회와, 결과적으로 백악관까지 탈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거짓말로 인해 공화당은 지금 통치하지 못하고 있다.
<편집자 주: 칼럼이 나간 후, 공화당은 오바마케어 폐기안을 상원 표결에 부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초 폐기안을 재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