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되면 아카시아가 그립다.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의 길목에서 불현듯 아카시아를 떠올리는 것은, 감상에 젖은 센티멘탈 때문이 아니라 아카시아에는 어쩐지 해질 무렵, 선선한 바람을 타고 센슈얼한 가을의 훈향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대지의 열풍을 삭히고 아련히 피어오르는 밤안개같기도 하고, 스러져가는 청춘의 아픔같은 진한 매혹…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향기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상 시인은 임종시 멜론(혹은 레몬이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의 향기를 맡고 싶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향기가 그리울 때는 그만큼 산다는 아픔이 영혼을 짓누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수십 년만에 잊고 있던 친구에게 소식이 왔다. 전화로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는 의젓하고 안정돼 있었으며 좀 힘들게 살았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수원 市인가 어디에서 모 금융기관의 지부장을 하고 있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녀석에 비하면 나는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라는 곳엘 와서 여지껏 고생만 하다가, 요즘도 일년 열두 달 바캉스 한번 못 가고 일에 쩔어서 살면서 삶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숨쉬는 공기조차 원망하고 있는 중이다.
그저 찬 바람 피할 수 있는 작은 집 한채… 여지껏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할 터인데 여전히 목 마르고 궁핍하기만 한 것은 웬일일까?친구 녀석은 당시 다니던 교회의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고, 나는 총무를 맡고 있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숲이 우거진 뒷산 아래, 아늑한 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녀석과 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목회자의 공백 때 생긴 교인들 간의 알력 때문이었다. 같은 고향출신의 새 목회자를 임용하려는 녀석의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대파가 생긴 때문이었는데 녀석은 새 목회자를 따라 교회를 떠나갔고 나는 녀석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녀석과 나 사이에 생겨난 갭이었다.
문제는 어른들 뿐 아니라 순진무구했던 학생회 아이들까지 어른들의 싸움에 휘말려 본의 아닌 이산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들자 이별이라고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고 특히 우정과 사랑… 믿음과 순수의… 짝사랑의 가슴앓이를 하던 아이들과의 이별은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집에서 교회로 이르는 길에는 아카시아 숲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향기로 가득하던 봄날의 아카시아는 가을과 더불어 이별의 쓴 맛만 남긴 채 텅빈 잎사귀만 쓸쓸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느 저녁 예배 때인가, 헤어졌던 아이들이 찾아왔다. 아마도 몸이 편찮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온 모양이었는데 그때가 우리에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원치 않았지만, 고개너머 집까지 밤길을 바래다주면서부터 나는 왠지 입안 가득히 아카시아 껌을 씹는 버릇이 생겨났다. 물론 아카시아의 추억은 그 싱그러움을 뒤로 하고 점차 순백의 향기를 잃어버리는, 그런 인위적인 삶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지만, 가을은 화려한 봄의 향기를 상실하면서 나는 다소 이성적인 인격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물론)그 당시 꽃향기가 안겨주었던 그런 예언적인 요소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는 어느덧 현실주의에 찌든 어설픈 성인으로 성장해 가기 시작했다.
낙천적이면서도 꿈꾸는 아이에서, 머리만 커졌지 갈수록 강렬해져만 갔던 현실적인 욕구… 환타지로 짙어져만가던 고립된 성격… 풍요로운 비전보다는 인색한 자기 방어와 피해의식… 감사의 가을보다는 메마른 공허와 허기진 겨울들… 그것은 마치 단 한차례의 기도도, 간절함도 없이… 그저 삭막하게 시들어가는 통속적인 삶… 텅빈 가지에… 잎새만 나부끼는, 잃어버린 아카시아의 추억이기도 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향기가 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독특한, 자기만의 향기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고 소통하며 또 삶을 완성해 나간다. 각자 꿈으로 전해지는 향기… 무엇을 꿈꾸느냐가 그 사람의 모습이고 과거, 미래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꿈꾸며 살아갈까?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현실의 인색한 이야기들… 스스로에게, 또 모질었던 그동안의 (세상과 자신에게 안겨준) 상처들을 회개하며, 먼 이야기처럼… 가을 창가에 앉은, 참회의 아카시아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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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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