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음악 등은 때때로 긴 시간의 갭을 이어주기도 한다. 무심코 잊고 있던 추억의 편린, 문득 잠재의식 속에만 내재하고 있던 감정의 일부를 얼추 일으켜 세워 잠시나마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하곤한다.
2년전 쯤에 우연히 보았던 영화 ‘아나스타샤’ 는 작품성을 따지거나 영화에 몰입하기에 앞서 그것이 단순히 오래된 옛날 (1956년)영화였다는 점에서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듯 6, 70년대의 한국 사회 속으로 추억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6, 70년대만해도 영화관 출입은 학생들에겐 금지된 장난이었다. 단속반도 단속반이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탈선(?) 조장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저 숙제같은 것을 빳다 몇대로 때우고, 모험이 기다리는 창밖의 세계… 극장 셉쳐(훔쳐)들어가기, 아니면 등록금이라도 부풀려서 서부의 쌍권총, 아니면 중국영화에 나오는 깡따이 정도는 알아야 수학공식 한 두개 처지는 것보다 친구들 사이에서 더 폼잡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특히 극장 복도 마다 붙어있던 찬란하고 유혹적인 포스터들… 저 영화만큼은 꼭 한번 봐야지… 하게 만들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는 지금도 늘 생각나곤 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눈부시게 하얗던 치아… 맑고 푸른 눈은 지금도 그녀를 다른 인물로 착각하게 만들곤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에서 해괴한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되는데, 애나 앤더슨이라는 여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 군대에 의해) 처형당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제정 러시아 황실의 유산 상속에 대한 소송을 걸었는데 사실 아나스타샤가 총살당할 당시 철제 단추에 총알이 박혀 살아남게 되었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였다. 더욱이 애나는 황실에 대한 해박한 지식… 실체의 일부가 아나스타샤와 흡사, 진위를 가리는 소송은 장기화됐고 이 이야기가 바로 프랑스의 마르셀 모레트가 희곡으로 만든(1954년), 영화 ‘아나스티샤’ 의 배경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한 여인의 모습이 시시콜콜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흑백 영화처럼 잔잔한 영화 ‘아나스탸샤’ 는 한국에서 추상(追想)이란 제목으로 상영되기도 했으며, 그 당시 전세계 수많은 여성들에게 신데렐라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했다. 1956년도 영화치고는 수려한 칼라, 스크린 배경도 화려하지만 율 브린너 등 주역배우들의 연기 또한 박진감 넘친다.
장중한 soundtrack도 영화에 집중시키는 큰 몫을 하지만 영화를 보는 진짜 재미는 가짜 아나스탸사가 마치 진짜 아나스탸사처럼 보이도록 이끄는 마력이다. 아나스타샤 역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맡았고, 버그만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상을 탄 것은 물론 헐리우드에서의 재기에도 성공했는데, 41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고 청순해 보인 버그만은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물씬 풍기며 역시 명배우라는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미모와 지성의 여배우 버그만은 ‘카사블랑카’ 등으로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작품에 감동, 연애편지를 보낸 뒤 그에게 날아가버려 끼있는 유부남 유부녀끼리의 스캔들로 비화, 한때 버그만은 헐리우드에서 거의 추방되다시피했다.)
버그만의 연기가 하도 리얼해서 아나스타샤의 이야기가 가짜로 확인된 뒤에 조차 뭇 여인들에게 아나스탸사의 존재와 공주병의 신드롬을 낳았던 작품. 그런데 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마치 거리의 뭇 여인들처럼… 단순히 아름답고 간절함때문이라도 영화 속의 그녀가 황녀임을 믿고 싶어했던… ‘Journey to the past’(추상) …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나할까. 정체성에 괴로움을 느낀 나머지 애나가 왕녀의 지위를 버리고 부닌(황실 장교)과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 만화 영화 (등)에서는 ‘Journey to the past’… 주제곡이 흐르는데, 추상(追想)이라고 해야할지… 잊고 싶은 과거… 잔다르크 역을 하고 싶어했던 열정의 여배우 버그만은 불륜으로 상처를 내기도 했지만, 영화처럼 삶을 살다 1982년 (67세)생일날, 스스로를 자축하며 쓸쓸히 사망한다.
아나스타샤와 버그만… 버그만과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는 (‘아가씨’ 의)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 (70년대)문숙과 이만희 감독 등… 인간들의 속됨 모습을 반추시키면서 삶과 연기를 위해 살다갔던 연기자들의 비애를 전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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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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