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포토맥 포럼 주최 <동부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지난 7월 실시된 동부 문학기행 참가자들.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 세일럼매사추세츠 보스턴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세일럼(Salem) 시내에 들어선다.
사실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성공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순수한 복음주의인 청교도(Puritan) 들이 새 천지를 꿈꾸며 보스톤 지역의 둥지를 틀고 미국의 독립까지 이끌었던 이들이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세일럼 이었다.
너무나 청교도의 복음주의가 도를 넘어섰는지 유럽에서 광풍이 지나간 마녀사냥이 이곳 세일럼에 바로 이웃한 세일러 빌리지에서 벌어졌다. 나는 이제 이 마을에 들어가서 마녀사냥 박물관이나 호손의 집에서 마녀사냥에 대해서 몇 마디 해야 한다. 나는 마녀사냥에 대해서 나의 소개를 정리 해 본다.
마녀사냥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마녀사냥의 시작에 앞서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해야 한다. 로마제국이 망하고 반달족, 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의 출현 등 여러 군주들이 할거하던 시절 바이킹족이 노르만디를 침공한다. 프랑스왕은 그를 왕가에만 주던 공작 지위를 주어 그를 노르만디 공으로 임명한다. 그 노르만디의 기욤공이 영국을 정복하여 그는 프랑스 공작이자 영국의 왕(1066년)이 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27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의해서 파문을 당한다. 그는 카노사에서 1월의 겨울비를 맞으며 용서를 빌고 그리고 3일 만에 사면을 받고 복권을 한다. 이것이 사실 교황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왕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사보타지에다가 군사적 위협까지 한다. 교황들은 노르만디 공의 영향력권인 시실리에서 군의 보호하에 지내며 로마에 오지도 못한다.
교황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반격을 노리던 중 군주들을 교황 휘하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모든 영주들에게 십자군을 결성, 이슬람 세력에 들어간 예루살램 탈환을 명령한다. 즉, 1088년 클뤼시 수도원 출신의 우루바노스 2세가 교황에 등극하면서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호소하고 1096년 십자군이 첫 출동하였다는 말이다.
특히 4차 십자군 원정때 영국의 사자왕(킹 리차드) 와 살라드 칼리프와의 전쟁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1270년 8차 십자군을 끝으로 십자군 출병은 실패로 끝난다.
바로 이 200여년에 걸쳐 대규모 출병이었던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사회는 전쟁 후유로 혼란과 분열로 이어지고 생활과 도덕의 개념에 대한 변화에 직면하고 공동체에 가치관이 흔들린다.
바로 이 시기에 도미니크 수도사 2명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을 출간하고, 마침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소개로 이 책이 널리 읽힌다. 그 책의 취지는 ‘무당 그리고 미신적인 토속/민속 풍속 특히 민간요법의 의료 행위’ 등을 악마의 행위로 보았고, 이를 퇴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대부분 여자들이었기에 그들을 처벌함이 마녀 사냥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처형은 그 이름이 ‘종교재판’이었고, 때로는 여자들을 발가벗겨 화형을 시켜 남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 마녀사냥은 원한관계의 보복, 또는 금전적 이득을 보려는 불순한 동기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주로 돈 많은 과부들의 희생이 컸고, 또 유태인 여인들이 많았다. 그 결과로 마녀하면 유태인 여성의 특성인 매부리코의 검정 옷을 입은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돌풍으로 14세기부타 1 세기까지 20만명에서 50 만명이 희생되었고, 프랑스 구국의 영웅인 잔 다르크(1412-1431)도 영국에 잡혀가서 종교재판을 통해 악마가 씌어졌다고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은 결국 마녀사냥 악행의 돌풍은 종교도 과학도 아니고 법으로 구제되었다.
한편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에서의 마녀사냥 광풍이 지나가고 난 17세기 말 18세기 문턱에 미국에서 뒤늦게 발생했다. 바로 청교도의 이주 마을 세일럼(Salem) 빌리지에서 1692년 부임한 목사 새무엘 패리스의 두 딸이 병이 들면서 시작 되었다. 병 치료가 안 되고 그 병의 원인을 모르자 의사가 ‘숨어있는 마녀 때문이다’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흑인 하녀가 첫 대상이 되고, 이어서 악령이 씌였다고 엉뚱한 사람들을 잡아내고 그리고 고문에 의해서 허위자백으로 마녀사냥은 시작되고 그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들이 돌고 돌아서 급기야 패리스 목사까지 지목되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13명의 여자, 6명의 남자가 희생되었고, 140명이 악령이 들었다고 마녀사냥이 만연했던 사건이었다. 결국 1692년 가을 총독 윌리암 핍스가 종교재판에 대해서 해산 명령내리고 나서 진정된다. 차후 이야기지만 목사의 딸이 아팠던 것은 오염된 호밀 빵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녀사냥의 에피소드종교재판 중에 사람인지 악마인지 구별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나 테스트도 하고, 바늘로 찔러보며 아픔을 느끼나 테스트도 하고, 털 속에 악마의 징표가 있을 것이다 하며 몸수색을 하는 등 지금 생각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타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니 나도 호손하면 그의 대표작 ‘주홍 글씨’ 그리고 아마도 중학교 교과서에서 ‘큰 바위 얼굴’을 읽었고 그저 인간의 위선을 한 여인을 통하여 준엄하게 꾸짖는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호손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로 이곳에서 ‘마녀사냥’ 종교재판에 집행자중에 하나로 죄 없는 사람을 목매어 죽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실에 무척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그의 이름이 본래 Hathorne 이었는데 이름에 w자 하나를 Ha 다음에 더 집어넣어서 Hawthorne으로 개명까지 했고, 인간의 위선,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다시 말해서 마녀사냥이 그로 하여금 소설로써 사회의 위선을 고발했다는 말이다. -글쟁이의 말에 꼬리를 단다“심증은 가나 확증이 없는 이야기” 어쩌면 아래 두 가지도 마녀사냥의 빌미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 1389년 유럽에 정체불명의 병으로 총 9,000만명의 인구 중 4,000만명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흑사병(페스트)이었다. 당시 의학으로는 정체불명이었다. 당연히 악마의 저주, 그리고 이제 맞서는 마녀 사냥이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면역력이 생겨 이 병이 없어졌지만 동양의 사막지대의 동물의 벼룩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둘) 1300년대부터 영지주의 기독인들 사이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성녀, 예수의 부인, 예수의 수제자 등이라는 이야기가 실린 외경들이 나돌아 꽤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관심에 대상이었다. 당연히 가톨릭 교계에서 박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을 악마의 화신으로 몰았고, 이들을 상대로 마녀사냥도 있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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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 문인,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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