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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가 ◎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이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올해의 응모작에는 불법체류 단속과 관련된 소재가 여러 편 눈에 띄었다. 또한 가족의 갈등과 정체성 문제도 여전히 주요 관심사로 다뤄지고 있었다. 작품들이 다소 상투적이고 소박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점점 구체적이며 다양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현주씨의 ‘가족’은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가족애와 이웃애를 담은 따뜻한 작품이다. 부당하고 불안한 삶의 조건 아래에서도 인간의 품위와 신뢰를 지켜내려는 모습. 그것이 일상적 에피소드 속에서 절제된 필치로 섬세하게 포착돼 있다.
이준호 씨의 ‘좀비 아포칼립스 서바이벌 키트’는 단편소설의 요건을 고루 갖춘 개성 있는 작품이다. 온전한 정신을 잃고 무력하게 끈에 매달려 있는 노인을 우주인의 유영에 빗대 존재의식을 섬뜩하게 일깨우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 두 작품을 가작으로 뽑았다.
당선작은 구원경 씨의 ‘그 아버지의 딸’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과 ‘실패라는 매듭으로 꽉꽉 조여진 자신의 인생을 닮을까 봐’ 걱정한 탓에 오히려 딸과 멀어져 버린 아버지의 어긋난 내면, 그 아버지와의 반목을 감수하고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딸의 당당한 모습을 설득력 있게 대비시킨 작품이다.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압축된 대화, 표정이나 감정 기복의 섬세한 포착, 긴장감을 주는 구성솜씨가 뛰어나 단편소설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신재동 씨의 ‘못다한 배반’은 불법체류자 단속요원인 청년이 동포를 도와야 한다는 명제에 부딪히는 갈등상황을 흥미롭게 그렸다. 선량한 가해자라는 설정이 신선하고 희극적 결말도 재미있었지만 문장과 구성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소은희 씨의 ‘콘월 햇빛’은 방향이 뚜렷하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었으나 반복적인 내면의 토로가 긴장감을 떨어뜨렸다.
박혜선 씨의 ‘하오의 긴 터널’ 역시 안정된 글솜씨와 문제의식을 갖추었지만 아쉽게도 당선권에는 들지 못했다.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도 몰랐던 내면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치유의 기능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한 편을 완성한 모든 응모자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싶다. 당선자들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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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소설가) ◎
현실의 일을 그대로 옮긴다고 해서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말일테니 이렇게 바꾸어보자. 현실에서는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그래서 근사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믿었던 사실들이) 소설로 옮겨왔을 때 개연성을 얻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오히려 소설은 거꾸로인 경우가 더 많다. 소설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들이 현실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너무나 가짜같아서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현실에서는 ‘정말 소설 같은 일이야’라고 말한다는 걸 생각해보자.)
미주 한국일보의 문예공모에 투고된 소설들을 읽다보면 현실 삶과 소설의 경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작가의 경험에 기반을 둔 소설들. 혹은 작가가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아 쓴 소설들. 이런 글들의 장점이라면 문장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에 투고된 소설들도 역시 그러해서 소설의 완성도를 떠나 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올해는 특히 이민자 삶의 고단함을 다룬 소설들이 많았는데 공감가는 글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쉬운 글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이야기에서 인물이 소설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소설가인 자신이거나 혹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소설가도 잘 모르는 가공의 인물일 경우가 많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주인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아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에세이와 픽션의 차이일 것이다.
심사를 하면서 좋은 글들을 많이 읽었다. 거기에 작가가 주인공을 만드는 일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더 좋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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