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찍은 안토니오 부부 사진을 가지고 수소문 하며 그들이 이사 간 멕시코 어촌 작은 마을을 찾아 갔다. 싱싱한 생선도 좀 얻을 겸 해서 말이다. 16년 전 그들에겐 12살짜리 딸이 있었다. 의료 혜택을 못 받은 딸은 골수암이 전신에 퍼져 복수도 꽉 찬 말기 환자였다. 안토니오 부부는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딸을 차에 뉘여 1시간 걸려 우리 의료 봉사 현장으로 찾아 왔던 것이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비록 의사이지만 미약한 나로서는 이 소녀에게 지푸라기 정도의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진찰 현장과 그의 집을 오가면서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딸에게 진통제와 영양제 그리고 간호약품, 아동용 비디오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들은 일곱 명 가족이 단칸방에서 하얀 침대 시트로 막을 치고 딸의 거칠고 고르지 못한 할딱거리는 숨소리를 들어가며 아픔을 나누었을 것이다. 어둠 속의 신음소리를 속수무책으로 듣는 가족들의 처절한 심정이 측은하게 전해져 왔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방구석에 놓인, 검정색 표지가 수많은 손길에 닳아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성경책이었다. 그들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얼마 후 딸은 고통과 신음 속에서 임종을 맞았다. 우리는 안토니오 부부에게 의료봉사 팀에서 전도사 역할을 해주기를 부탁했다. 우리가 누구를 전도사로 임명할 자격은 없지만, 몇 년간 이 부부는 전도사 역을 훌륭히 해나갔다.
먼 지역에는 유일한 알림의 수단이었던 AM 방송을 통해 우리의 봉사일정을 알렸고 그들은 ‘안토니오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마을 사람으로 부터 전해 들으면 한 시간 걸려 의료봉사 현장으로 달려오곤 했다. 농장 황토 벌판에서 성경책을 들고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농부들에게 전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 후 그들은 마을 한구석 공터를 얻어 직접 시멘트 블럭으로 방을 이어가며 지어 출가한 아들딸들 모두를 데리고 공동 황토마당 안에서 살았다. 그런 안토니오 가족을 10여년 만에 만난 것이다. 그들은 황토마당으로 달려 나와 진심으로 반가이 맞아 주었다. 오래전 자기 딸, 자기 형제를 보살펴 주었던 의사를 아직도 감사하며 기억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당시 한 명뿐이었던 손주가 지금은 21명이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주들을 하나 둘씩 나에게 인사 시키고는, 나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손주들에게 권한다. 7~13세 아이들이 그 가족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인 황토 마당에서 내 바지를 잡고 차례로 통성기도를 진지하게 해준다. 한낮 뜨거운 햇볕 아래의 긴 기도는 무더위가 아닌 이 가족의 따스함으로 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공동체 안에서 같이 희로애락과 가난을 겪으면서 세워진 유대가 이 가정의 화목함을 이루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진 가난과 고통을 겪었지만 화목한 분위기에서, 옛날에 약간의 도움을 준 사람을 십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감사하며 반가이 맞아주는 가족들이 새삼 아름다웠다. 오래된 그 성경책 속의 구절들을 가족 모두가 이 황토마당에서 함께 살며 터득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핵가족 제도는 바쁜 현대 사회에서 편리한지 모르지만 공동마당 같은 곳에서 활성화되는 소통과 이해의 기회는 점점 사라진다. 활성화된 소통은 공동체의 생명력을 키워 주고 소통 단절은 공동체의 생명력을 억압한다. LA로 운전해 돌아가는 길, 차창 밖으로 총총히 뜬 별들이 보인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 공동 마당에서 보았던 별들이다. 나는 어느새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공동마당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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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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