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보았다. 박근혜 정권이 좌파 영화라 낙인찍어 이것을 만든 CJ 그룹 부회장 이미경을 미국으로 내쫒았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광해군의 아버지는 조선 최악의 왕으로 손꼽히는 선조다. 임진왜란 때는 세자 광해가 선조를 대신해 전란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우고 왕이 되어선 초반엔 정치도 제법 잘 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광해군과 허균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놓은 사극이다. 왕인 광해군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승지 허균에게 대역을 찾으라고 명한다. 이에 허균은 광해와 외모가 닮은 천민 하선을 찾아내 가짜 왕 노릇을 시킨다. 과거 일본에서처럼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가짜 군주’(카케무샤)로, 군주와 닮은 사람을 선정하여 진짜 군주 대신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위장 대역인 셈이다.
난폭했던 광해와 달리 하선은 인간미 넘치는 임금으로 선정을 베풀며 국사를 너무나 잘 돌보게 된다. 그러나 역모를 꾸미던 신하들은 궁녀를 통해 광해군이 진짜 광해군이 아님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간다. 이 사실을 알고 하선은 도망치나 군사들에게 막히고 이에 가짜 왕임에도 그를 흠모했던 도부장(호위부장)이 결사 항전하여 하선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하선에게 허균이 찾아와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한편, 일본의 3대 영웅 중 한 사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실 카케무샤가 연기했다는 설도 있다. 만약 영화 속의 하선처럼 최순실이 박근혜의 대통령 노릇을 잘 했더라면 무능한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너희에겐 가짜 왕일지 몰라도 나에겐 진짜 왕이”’란 도부장의 외침은 시사 하는바가 크다. 가짜 왕과 진짜 왕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전언인데, 형식은 내용을 담보하고 내용은 형식을 담보한다는 고전주의 문학이론을 되새기게 한다. 형식이 바뀌면 내용이 바뀌고 내용이 바뀌면 형식이 바뀐다. 형식과 내용이 별개일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
내용이 진짜(진실)일 때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도부장의 파격은 반역이다. 형식이 가짜일지라도 내용이 진짜면 진리라는 도부장의 외침은 작은 혁명이다. 제도(형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게 인간 삶(내용)이다. 그러나 제도(틀)의 구속력이 인간의 삶(내용)보다 중요시 되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인데, 제도를 운영하는 권력자들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도부장은 기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버선이 다 더럽혀진 왕(하선)의 발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앉고 죽어간다. 그는 눈빛으로 말한다. “당신을 위해 죽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왕은 그를 부여 앉고 오열한다. 한 사내가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군왕에게 신하는 흔쾌히 목을 내놓는다. 목숨을 내걸었기에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보다 더한 순정이 어디 있으랴. 마음과 마음의 교감, 소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아니 도부장은 가짜 왕이란 걸 알면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사랑하였음으로) 그러고 보면 인간만큼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하는 동물이 있을까 싶다.
영화를 보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시대 인물인 이순신이란 남자와 윤동주란 남자가 만났다면 그들은 어떤 사랑을 나누었을까 생각했다. 임진왜란 그 참혹한 전장을 누비면서도 오직 침묵으로만 일관했던 사나이 순신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사내 동주가 만났다면 그들은 어떤 사랑을 나누었을까. 투박할지라도 멋이 없을 지라도 사내들의 ‘Love Story’가 보고 싶다.
몸과 마음을 다한 사랑은 아름답지만 너무 아프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아프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는 영악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을까.
cheabin04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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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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