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말 투르크의 족장 오스만이 세운 오토만 제국은 한 때 유럽과 중동의 강자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서로마가 망한 뒤 1,000년을 버티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토만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인 코 앞까지 진격했으며 발칸 반도와 중동,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 지역과 동 아프리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면서 서유럽이 국력을 키워가는 동안 과거의 영화에 도취한 채 쇠락의 길로 빠져 들다 19세기에는 ‘유럽의 병자’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었으며 제1차 대전에서 독일과 한 편이 됐다 지는 바람에 오토만 왕조도, 제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터키 다음으로 ‘유럽의 병자’ 타이틀을 얻은 나라는 영국이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잘 나가던 영국은 제2차 대전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어 빚만 잔뜩 진데다 식민지를 모두 잃어버리고서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무리한 복지 정책을 펴다 국가 재정이 거덜났다.
그 결과는 고실업과 저성장, 중과세와 만성적인 파업이었다. 1978년 청소부 파업으로 런던 시내가 악취로 진동하자 영국 국민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시장 친화적 자유 경제를 통해 부흥을 약속한 마거렛 대처를 총리로 선택했다.
대처는 집권 후 석탄 노조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감세와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등 친시장 정책을 펴 빈사 상태에 있던 영국 경제를 살려냈다. 이런 정책 기조는 노동당이 집권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영국은 유럽에서는 가장 활기 있는 경제를 가진 나라의 하나다.
다음으로 ‘유럽의 병자’가 된 것은 독일이다.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90년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뤄냈으나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에다 경직된 노동 시장, 후한 실업 수당으로 두 자리 수의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로더 총리의 ‘어젠다 2010’이다. 중소기업의 직원 해고를 쉽게 하고 파트타임과 임시직 고용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실업 수당 최대 수혜 기간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개혁안은 노동계의 반발을 받았지만 슈로더는 뚝심으로 밀어부쳤다. 그 결과 지금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과 높은 경제 성장을 자랑하며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유럽의 병자’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도 10년 가까이 10%가 넘는 고실업에 낮은 경제 성장, 중과세와 만성적인 파업에 시달리고 있다. 전임 사회당 정부는 이를 타개하겠다고 최고 세율을 75%까지 올렸지만 부자들이 해외로 탈출하자 세금은 걷지도 못하고 투자 환경만 악화시킨채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개선한다고 주 35시간으로 묶여 있는 노동 시간 연장안을 추진했다 노조의 반발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올랑드 전임 대통령이 한 자리 수 지지로 재선에 출마조차 해보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한 것은 경제난 해결에 실패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오랜 경기 침체에 지친 프랑스인들은 올 대선에서 39세의 정치 신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열린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전진하는 공화국’과 파트너 정당인 민주운동당은 전체 577석 중 351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뒀다. 선거 전까지 한 석도 없던 정당이 절대 과반수를 넘어서는 거대 정당으로 탄생한 것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더더구나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래 자유 시장 경제보다 국가주도 하의 경제를 신봉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 마린 르 펜식 극우주의와 장 뤽 멜랑숑류의 반세계화 반유럽주의가 판을 치던 나라다. 이런 곳에서 시장 친화적이고 유럽주의자며 세계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크롱 같은 인물을 지도자로 택했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변이다. 프랑스인들의 좌절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마크롱이 악명높은 프랑스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깨고 대처나 슈로더 같은 개혁을 이뤄낼 지는 두고봐야 하지만 오랜만에 프랑스 경제가 부활의 기회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그와 프랑스 국민들이 모처럼 피어난 희망의 싹을 키워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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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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