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를 재울 시간이 되어 뭘 읽어 주나, 책을 뒤적이는데 손자가 냉큼 ‘돌아온 라씨’를 꺼내 든다. 빨리 재우고 싶어 짧은 것을 고르려 했는데 책 표지에 그려 있는, 큼직한 개를 안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아이가 꽂힌 거였다. 다른 걸로 하자고 살살 꼬셔봐도 절대로 맘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 책은 베드타임 스토리로 읽어주기엔 너무 길었다. 손자를 이길 길이 없어 할수 없이 읽기 시작했다.
한참 전, 영국이 너무 가난했을 때 광부였던 아빠가 직장을 잃고 당장 먹을 게 없어 소년이 기르던 콜리종 개를 팔았는데 스코트랜드로 팔려 간 그 개가 일 년이 넘어 걸린, 천 마일의 가시밭길 대장정을, 산 넘고 물 건너 소년 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나도 어렸을 때 읽었고 애들이 어렸을 때도 읽어주었고 영화로도 봤으며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다 아는 이야기를 손자에게 읽어주는데 갑자기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슬픈 이야기로 둔갑한 걸까.
개가 온갖 고초를 하나 하나 힘겹게 넘어가는 동안 손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우는 손자가 마음 아파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공연히 애를 울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이제 그만 읽자고 하니 부득부득 다 읽어야 한다고 떼를 쓴다.
결국 둘이 부등켜 안고 울며불며 꽤 길게 엮은 그 책을 다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미안해, 너무 슬프지?’ 했더니 손자가 눈물을 쓱쓱 닦으면서 한다는 말이 ‘괜찮아. 그렇게 슬프니까 더 감동적이잖아.’ 한다. 입이 딱 벌어져서 아뭇 소리 못했다. 딴 애도 다 그런가? 얘만 더 감성이 풍부한건가?
손자 키우는 걸 곁에서 거들며 비록 몸은 정말 힘들지만 아이의 성장과정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것은 내게 너무나 큰 은혜였다. 손자가 몇 개월 밖에 안됐을 때 아이에게 오티즘이 있는 것 같다는 소아과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요렇게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에게 뭔 말같지 않은 소리냐고 기분 나빠 했다.
그런데 손자는 거의 모든 상황을 너무나 힘들어 했었다. 네 살이 되었을 때 아스파거라는 진단이 나오고 그에 대한 증상과 대응 지침이 주어졌을 때 그제야 애를 그토록 힘들게 한 모든 이유가 그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 남들은 전부 사내애는 다 좀 늦는다고,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는데 곁에서 보면 그 애의 힘겨움이 환히 들여다 보여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부모도, 다른 이들도 애를 너무 이뻐해 줘 자신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진득하니 의자에 붙어 앉지를 못해 특수 방석을 마련해 줬더니 조금 나아졌다는 통지가 와서 그 방석이 대체 뭔지 보려 학교엘 갔다. 선생님이 ‘힐머니께 네 의자를 보여주렴.’ 하자 자랑스럽게 내 손을 잡고 자기 자리로 가더니 ‘할머니, 애들이 전부 내 의자에 앉고 싶어해.’ 하며 으스댄다.
특별 취급 받는 게 본인에겐 자랑인가 보았다. 운동신경도 없다 못해 꽝이고 아직도 연필 하나 제대로 쥐고 쓰지도 못하며 스펠링은 엉망인데도 손자의 예민한 감수성은 종종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서너 살 때 십자가상의 예수를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아프겠다..., 춥겠다...., 챙피하겠다....’ 하고 혼잣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하고, 학교에 가서는 뭔가 꼬투리를 잡고 놀려대는 상급생 여자아이에게 ‘Mind your own business!’ 해서 할 말 없게 만들고, ‘네가 할머니보다 낫다. 할머니가 요새 속상한 일이 있는데 네 생각엔 어떻게 하면 괜찮을 것 같니?’ 하고 자문하는 내게 ‘생각하지 마.’ 하고 당당하게 조언을 한다.
내 애들을 키울 땐 나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는데다 치유되지 않은 많은 상처가 여전히 피를 흘릴 때여서 애들에게 여유로운 엄마노릇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엄마때문에 애들이 많이 힘들었겠지만 이제와 내가 어찌 해볼 방도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허락된 일은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많이 열려있는 손자에게 아무런 계산없는 사랑을 주는 것 뿐이다. 잘 깎은 연필로 한 점 콕 찍어논 것처럼 작은 씨앗 속에서 대체 어떤 꽃이 피려나 바라보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손자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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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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