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언어의 유희를 배우진 못했지만, 작가 이외수 등의 글을 읽고 있으면 어쩐지 언어에 대한 치열한 목마름을 읽을 수 있다. 글이라는 것은 다양한 가치관들이 장르별로 나열된 것이어서 모두가 곡예하듯 아슬아슬한 유희를 느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소설 중에 이상, 이외수 등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주는 그 감성적 유희가 남다르다. 물론 작가라고해서 그들의 철학을 모두 독자들에게 공감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아픔을 언어의 유희 속으로 치열하게 도피해 나갔던 그들의 글은 때론 감성의 공감대 뿐아니라 나름 감동을 주기도 한다. 특히 이상(李箱) 등이 그 한 예이기도 하지만, 이외수 등, 시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다.
작가 이외수씨가 12년 만에 장편소설(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을 발간했다는 소식이다. 얼마전 이 기사를 신문에서 접하고 갑자기 40년전의 소설 ‘꿈꾸는 식물’이 떠올랐다. 왜 일까? 그의 문학이 그렇게 무게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만화같이 웃기는 이외수의 소설들이 우리들의 (상식적)눈높이를 충족시켜줄 만큼,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도 아닌데. 그러나 마치 껌이라도 씹 듯 그의 작품이 주는 심리적 평안함이 어떤 속물근성이라고나할까… 소년적인 천진함 속에서 나름 얼마든지 우리들과의 교감이 가능할 수 있다는, 폭넓은 식물적 소통의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상이냐 현실이냐 ? 쌍팔년도…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고민했던 주제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당시 유행하던 말은 현대사에 길이 기억될 격언으로 남아있다. 즉 ‘세상에 태어나서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군대에 갔다와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예술을 사랑하고 철학을 사랑하고…
뜬구름 잡는 환상에 가득했던 젊은이들도 군대에서 가서 몇해 뺑이 치고 나오면 정신이 하얗게 세탁되어 마치 세상의 모든 체험을 혼자 다 하고 나온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책이나 옆에끼고 살아가는 꿈꾸는 식물성들을 모두 도살해 버리곤하였다. 이에비해…
까라면 까라 식의 집단주의가 날뛰는 곳에서 정신세계의 지성들은 다소 반항적이고 자기 폐쇠적인 인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미국에 오니, 젊은이들이 한국과는 달라 보였다. 세치기를 당해도, 자동차를 추월당해도, 학교에서의 경쟁의식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예민하지도 않았다. 매사에 여유가 있어보였다. 다소 유아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창의적이다. 그런데 모두 그런 철학자가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너나 할 것이 모이면 구석에서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해피 스모크로 불리우는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것이었다. 꿈꾸는 식물이라해야하나…
대마(大麻)란(여전히 우리눈에 부정적이지만) 마치 많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또 파란많은 이 세상을 유체 이탈시키는, 무언가 모르게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여유를 가져다 주는 것 처럼보였다. 물론 그 알 수 없는 식물체란 때론 악마적일 수도 있고 또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아직 더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겠지만… 30년전에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을 읽으면서 (속으로)파안대소했는데 그것은 이외수의 소설이 어쩌면 그 시대를 대변하는 청년들의 일면, 자화상같기도 했지만 마치 그의 글이 (문체로 보는) 마리화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소설 ‘꿈꾸는 식물’은 장미촌이라는 포주집을 중심으로, 다소 퇴폐적이면서도 몽상적인 내용들이 이외수 특유의 톡톡튀는 문체로 그려지고 있다. 화물트럭 운전사 출신인 아버지(포주) 그리고 그 밑에서 아버지를 돕고 있는 해병대 출신 큰 형 그리고 정신적인 인간 작은 형(꿈꾸는 식물) … 그리고 이야기를 꾸려가는 막내이자 대학생 박민식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소설은 자못 정신세계를 가장한 소설만능주의내지 예술지상주의 따위로 포장되어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고자하는, 상처받은 자의식…
즉 실존주의 초인주의 소영웅주의가 비빔밥 잡채처럼 얽혀져 있는데 무언가 메세지를 주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편집성 인격장애의 인간들이… 별로 사랑받지 못하고, 애정에 굶주렸던 그들의 유년시절을 감추기 위해 특이한 삶이나 이야기… 정적인 평화 속에서만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식물 등을 통해 도피내지는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꿈꾸는 자로서의 구원의 찬가를 노래하고 있다.
장미촌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 소설은 어쩌면 권위주의를 온 몸으로 견뎌야했던 그들(의 시대)만의 고뇌이자 필연적 살수(殺手) … 예술이 거부당하는 세상에서, 그 운명 의식을 꿈꾸는 식물로 대신하여 절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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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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