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백악관 주변은 더욱 분주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 소식이 시시각각 쏟아졌고, 러시아게이트 수사가 점점 더 비화되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그리고 이런 소란의 와중에서 빅뉴스의 하나가 묻혀버렸다. 트럼프와 메르켈 독일총리의 설전이나 대통령 사위의 러시아 연계 의혹처럼 흥미진진하지는 않아도, 우리의 일상에 절대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요사안 - 위기에 처한 메디케이드다.
대통령이 첫 해외순방을 떠난 나흘 후인 지난달 23일, 백악관 예산국장 믹 멀베이니가 공개한 트럼프의 첫 예산안은 충격적이었다. 민주당의 거센 비판은 물론이고 공화당 일각에서도 반대와 우려가 쏟아졌다. ‘부유층의 감세 혜택과 저소득층의 복지 삭감’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예산의 골격이긴 하지만 그 삭감의 폭이 너무 커서다.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하는 예산안은 흔히 세탁물 목록(laundry list)이라 불리는 희망사항으로, 의회의 예산 입법과정에서 전폭 수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새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새 행정부의 우선순위가 한 눈에 드러나는 대통령의 예산안은 그 행정부의 국정방향을 시사한다.
“터무니없는 회계 착오”라며 “경제학 강의 듣는 대학생의 리포트였다면 낙제점을 받았을 것”이라고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가 혹평한 이 예산안은 대규모 감세에 의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3% 경제 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가 적극 지지했다는 유급부모휴가 예산 등 긍정적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시선을 주기엔 이 예산안에 의한 사회 안전망 훼손이 너무 치명적이다.
하이라이트는 향후 10년 6,160억 달러를 줄이려는 메디케이드 삭감이다. 만약 하원의 오바마케어 폐지안이 상원에서도 통과될 경우 양쪽 합해 메디케이드는 8천여억 달러에서 최고 1조4천억 달러까지 난도질당할 수도 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겐 글자 그대로 ‘재난’이다.
연방기금 수혜자만이 아니라 돈을 내는 납세자들(상당수 수혜자들도 세금 낸다!)에 대한 온정도 가져야 한다면서 이해하기 힘든 ‘편 가르기’ 온정론을 펴는 멀베이니 등 극우파들은 ‘메디케이드 개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번 삭감은 (거센 반대를 예상 못했을 리 없는) 트럼프가 작심하고 시작한 ‘메디케이드와의 전쟁’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듯싶다.
캘리포니아에선 ‘메디캘’로 불리는 메디케이드는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연방지원 의료보험이다.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의 빈곤추방과 경제번영을 위한 정책인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시행된 이후 미국 사회안전망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원래 메디케어의 작은 한 부분으로 출발했지만 소득은 정체되고 의료비는 치솟았던 과거 수십년 동안, 극빈층엔 속하지 않아도 민간의료보험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수백수천만명 서민들에게 메디케이드는 가장 중요한 생명선이 되어왔다.
수혜 숫자도 엄청나다. 현재 7천만 명이 넘는다. 미국민 5명 중 1명꼴이다. 캘리포니아에선 1,350만 명으로 주민 3명 중 1명이 메디캘 수혜자다. 미 전체 어린이 중 약 3분의 1의 의료비를 메디케이드와 관련프로그램인 아동건강보험(CHIP)이 커버한다. 소셜시큐리티와 메디케어는 이번 삭감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전국 너싱홈 거주자의 60%는 메디케이드 수혜자다.
민주당 뿐 아니라 공화당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메디케이드에 의존하고 있으며 저학력 백인 근로자들이 근간을 이루는 트럼프 지지층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트럼프는 공화 경선 당시 자신이 “메디케이드를 삭감하지 않을 유일한 공화당 후보”임을 거듭 강조했었다. 그 약속을 기억했다면, 역사학자 줄리언 젤리저가 지적한대로 그가 “고전하는 서민들을 위해 기득권과 맞서는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에 조금이라도 진지했다면” 이런 잔인한 삭감을 핵심으로 하는 예산안은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 예산안 관련 소식 중 가장 굿 뉴스는 의회 통과가 쉽지 않다는 전망이다. 오랫동안 하원 예산위원장을 역임하며 예산에 관한한 모르는 것이 없어, 자타가 공인하는 예산전문가 폴 라이언 하원의장처럼 ‘예리했던 지성’은 사라진 채 무조건의 지지를 표명한 충성파도 있지만 ‘의회 도착 즉시 사망’을 선언하거나 공개 타운홀에서 대폭 삭감에 정면 비판을 가하는 등 반대하는 공화의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취임 불과 넉달 만에 심상찮은 스캔들에 휘말려 탄핵여론까지 높아지면서 입지가 약화된 대통령에겐 자당의 표를 단합시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더구나 상당수 유권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인기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하는 일에 재선을 앞둔 의원들이 선뜻 동의할 리가 없다.
이번 ‘메디케이드와의 전쟁’은 승리에 집착하는 트럼프에게도 이기기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합리적 전망과 상식적 예상을 뛰어 넘어 백악관에 입성한 트럼프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가혹한 예산안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지역구 연방의원들에게 대폭 삭감을 저지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캠페인은 이미 시작되었다.
트럼프 예산안 13개항 중 9개가 대폭 삭감이다. 굶주림에서 구해주는 푸드 스탬프와 서민 자녀들의 대학교육을 가능케 하는 학자금 대출 지원, 장애인 혜택에도 칼날이 겨누어졌다.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트럼프 예산안 저지는 메디캘 수혜자 많은 한인사회에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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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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