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빛 싹이 삐죽 올라오며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채 듣지도 못했는데 벌써 여름이 온 듯하다. 올 봄은 오는 둥 마는 둥 벌써 가려고 채비를 하고있다. 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치면서 대기의 모든 먼지를 싹 가져가 버린 다음날 아침, 이른 출근길에 브로드웨이 몰 우체국에 들렀다.
편지를 부치고 차의 시동을 켠 순간 환하게 비치는 햇살아래 극명하게 드러나는 주차장의 온갖 사물들, 각종 상점들의 입구와 유리창에 더덕더덕 달라붙은 먼지와 때, 주차장에 흩어진 비닐봉지들....드러난 민낯을 보면서 우리 삶도 이처럼 남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고 보잘 것 없으나 이 남루함이 싫지 않았다.
희로애락이 누더기처럼 기워진 삶처럼 이 남루함 마저 고마워해야 하고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 사명감처럼 다가왔다. 살아있으니, 쓰임을 받고 있으니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중순 워싱턴DC의 친척 오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국이 그립거나 멀리 여행을 가고 싶은데 마땅히 갈 때가 없으면 무작정 워싱턴으로 갔고 오빠는 언제라도 반겨주었다. 장례식에 가서야 많은 것을 알았다. 미사를 집전한 신부는 “40여년을 의사로 일하면서 쉬는 날에는 외로운 노인, 저소득층 무료진료를 해왔다”고 알려준다.
평생을 내과 가정의로 일하며 봉사의 삶을 살던 오빠는 올 2월초 오전에 환자를 보고 너무 배가 아파서 오후에 병원으로 들어간 것이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환자 진료 중이라도 뉴욕동생이 전화했다고 하면 전화를 받아서 ‘오빠가 이따가 전화할 게’ 한마디 하고는 그날 저녁 9시 넘어서라도 꼭 전화를 해주었다.
“왜 아직까지 집에 안가시고? ” “낮에는 시간이 없어서 서류 정리하고 시도 쓰고...” 손 한번 잡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아내와 50년간 함께 살아 너무 행복했다는 그는 ‘여러분들 감사하였다’ 는 말을 남겼다.
네 명의 아이들 생일때는 케익만 하나 달랑 사주고 사람들의 선물이나 용돈을 모조리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사역하는 신부님께 보냈다고 한다. 이는 대물림되어 성장한 아이들도 특별한 날 쓰일 돈이 몽고 한 마을에서 신부 세 명, 농학박사, 건축가 등 10여명의 인재를 배출시킨 장학금이 되었다.
이 멋진 오빠를, 이 귀한 존재를 이제야 느끼고 있다. 살아생전에 좀더 진지하게 시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오빠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의대를 가야 했던 오빠는 아이들 다 키우고 60이 넘어서야 시를 쓰면서 워싱턴문인회, 워싱턴펜클럽회장, 윤동주문학회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사람은 한번 가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이번에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30여년전 내곁을 떠난 엄마도, 25년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도, 한번 떠나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민1세인 오빠가 가니 타인종과 결혼한 조카들은 한국말도 잘 못하고 멀리 떨어져 살아 그나마 오빠로 인해 이어지던 끈이 툭 끊어진 듯, 이제 워싱턴 갈 일이 있을까 싶다. 3세, 4세 자손들은 “옛날 옛적에 증조(또는 고조)할아버지가 공군 군의관으로 가방 하나 들고 미국 땅을 밟았지.” 하며 가문의 역사를 떠올리겠지.
미주한인의 역사는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나는 누군가,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물으며 오늘도 내일도 흘러가고 있다. 그날로부터도 37년이 흘렀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문재인대통령과 참석자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1980년 5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기자인 나는 막 편집을 끝낸 대장을 한아름 들고 선배기자와 함께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는 가건물로 검열을 받으러 갔다. 군인아저씨들은 빨간 색연필을 들고 죽죽 가위표를 하거나 동그라미를 치며 검열을 해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느낌 없이 대장을 들고 다닌 그 오월, 37년이 지났다. 지나고 보니 삶은 늘 후회하고 부끄러운 일투성이다. 다시 못 올 길로 그리운 이를 보내고 나서야 좀 더 다정하게 대할 것을, 좀더 당당하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중이다. 계절은 눈부신 오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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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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