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주위에서는 자꾸 보라고 권한다. 나도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건 안다. 그러나 내게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드라마로 시간을 보내는 게 아깝다. 또 이즈음의 젊은 이들의 상상력은 어마무지해서 재벌집 아들과의 연애는 당연한거고 백년 전의 대왕마마와도 사랑에 빠지고 별에서 온 외계인과도 사랑에 빠지며 하다못해 도깨비와도 절절한 사랑을 하는 모양이다. 내 낡은 뇌로는 그 상상을 따라갈 길이 없다. 게다가 이젠 더 이상 남자라는 존재가 내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으니 아마 그래서 드라마가 별로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보다는 현실세계를 너무 잘 알게 되다보니 사랑이라는 그 안개속 곳곳에 부비트랩처럼 깔려있는 갈등이 먼저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만오천년 내지 삼만년 전의 케이브맨들이 그린 알타미라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면 정말로 깊히 깊히 감동이 되면서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상상해 보곤 한다. 그러면서 영혼의 교감과 육체의 교감중 어느 것이 더 절실하고 사무치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친구를 사귀는데도 공감대없이는 곤란하다.
하물며 수만년 전의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영혼 교감의 깊은 감동이란 시공을 넘어설수 있는 인간의 신비와 위대함의 증거가 아니랴. 저절로 숙연해 진다. 그렇게 찬탄하면서도 그러나, 정작 그 원시인과 맞닥뜨리게 되면 아마도 나는 어마나, 무서워라, 혼비백산해서 꽁지 빠지게 달아날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환경에 놓여있으면서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편견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더럽기는 하지만 케이브맨에 비하면 말도 알아들을 수 있고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에 속해 있는 무숙자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중에 내 소울메이트가 될수 있는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절대로 용납 못한다. 우린 성공한 사람은 존경하고 실패한 사람은 경멸한다.
예쁜 사람은 사랑 받고 미운 사람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학벌이 좋으면 일단 먹히고 학벌이 나쁘면 다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에 그 많은 규칙이 사실은 개개인의 처지에 따라 아주 비밀스레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프랑스의 새 대통령의 영부인이 25살이 더 많단다. 게다가 처음 만나게 선생과 제자의 사이였고 그 선생은 벌써 아이를 셋 낳은 주부였단다.
수만년전의 원시인과도, 도깨비와도, 백년 전의 임금님과도 사랑에 빠질수 있다면 까짓 여자가 25살 더 많은 게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우리땐 남자가 여자보다 어리다는 건 생각도 못했었다. 남자들은, 특히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은 스물다섯이 아니라 쉰살을 더 먹었어도 그럴수 있는 일이지만 여자는 그러면 안됐다. 물론 우리 시절에도 한말숙 작가와 황병기 국악인이 십년 연상연하 커플로 유명했지만 그건 작가니까, 예술가니까 사회에서 봐준 특권에 지나지 않았다.
엘리사베스 테일러가 결혼을 여덟 번 하고 그 중의 한 남편이 스무살 어렸다지만 그것 역시 엘리사베스 테일러니까 허용되었던 특혜같은 거였다. 만약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허접한 여자가 목숨 부지하느라 허덕이는 세월속에서 이리저리 흘러다니다 25살 어린 남자를 만나 산다면 행실 더러운 쓰레기같은 여자로 더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세상은 늘 그렇게 판단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사회의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25세 연상의 여선생이 될성 부른 학생에게 혼신을 다해 자신이 전수해 줄수 있는 모든 지성과 감각을 사랑과 함께 가르키고 함께 성장해 대통령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그건 당사자들의 승리를 넘어 평범한 인간들의 경직된 사고를 깨우치고 유연하게 해 줄수 있는 사례가 되기도 하는 것 아닐까.
잘 살아야 한다. 꾸밈없이 너그럽고, 겸손하고, 생명력 넘치게 살아야 한다. 참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자극을 이웃에게 줄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은 많은 사회적 제약마저 이미 뛰어넘는 자유로운 삶의 주인일터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그런 삶의 주인공으로 초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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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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