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을 게 너무 많아 바쁜 기분이다. 찬찬히 서가를 훑어보면 읽고 싶었는데 못읽고 만 책들이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조가비 같이 널려 있다. 그냥 이름만 알고 읽은 척한 책들은 차치하더라도 예전에 읽고 감명 받았던 책들은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
이즈음 레미제라블을 읽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소설로서의 스토리 라인도 방대하지만 챕터를 건널 때마다 그 시절의 사회상이며 인물의 배경은 물론이거니와 도시와 거리의 풍경, 하다못해 빠리의 지하에 있는 하수구에 대해서도 지독하게 세밀히 묘사해놔서 재미도 재미지만 무언가를 알고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제대로 읽어낼수 있다.
어렸을 때 읽을적엔 그런 지리멸렬한 설명이 읽기 귀찮아서 빨리빨리 스토리가 돌아가는 걸 알고 싶어 정치적 사회적 인문학적 배경이 되어주는 챕터는 슬금슬금 넘겨가며 읽었는데 이번엔 언제 다시 또 기회가 올지 몰라 돋보기 들이대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정성껏 읽었다. 아하, 나폴레옹이 이때 이런 싸움을 했구나, 이런 연유가 있어 그 싸움에 지게 된거구나, 혁명은 이렇게해서 일어났네, 그 시절 사회 밑바닥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은 정말 비참했구나. 빠리엘 가본 적이 있어서 쌩 드니가 거기 어드메였는데, 라뗑지구는 거기였구, 뽕텐블로는 외곽에 있었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재미였다.
그런데 주인공 꼬제뜨와 마리우스가 만나 사랑을 시작한 곳이 뤽상부르그 공원이었던 것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알았다. 아하! 그 공원! 마치 오랫동안 소식을 못들은 친구로부터 엽서라도 받은 기분이다. 뤽상부르그 공원을 가보고 싶었던 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때문이었는데 아마도 서울의 덕수궁쯤 될것 같은 그 공원이 정말 인상 깊었던 건 그곳에 모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하면 우선 스낵이며 음료를 파는 상인은 물론이고 풍선장수며 솜사탕 등 온갖 잡상인들이 행인들 이상으로 모여 시끌벅적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그 공원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조용조용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넓은 공원, 햇살 아래 의자에 앉아 모두가 책을 읽는 조용한 관경! 놀랍지 않은가? 사실 빠리 사람들은 기분 나쁘다. 잘난척하고 거만한게 무례해 보이기까지 한다. 온갖 명품을 만들어내고 유행을 주도해 남의 나라 사람들의 정신과 돈을 빼먹으면서도 정작 그들은 브랜드와 상관없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값싼 의상으로도 멋을 낸다. 그들로 하여금 거만할수 있게 하는 건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의상을 값에 따라 입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자신감도 존중해 줄줄 안다. 건전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부정한 권력이나 부패에 대해서도 정의롭게 분개할수 있으며 그것을 항의할 수 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타인의 실수에도 너그럽게 웃으며 다시 추스려 재도전 할 기회를 준다.
참된 자신감이 있다는 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프랑스 사람들이 자부심이 많은 건 그들이 그 무시무시한 혁명이란 커다란 댓가를 치루고 차지한 자유와 평등에의 긍지라고 볼수 있겠지만, 실은 공원에 모여 앉아 책이라는 세계속으로 들어가 역사가 말해주는 것, 고전이 가르쳐주는 것, 예술이 표현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나누고, 담화한 후에 걸러진 지적 자신감에 의함이 아닐런가.
거창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그러나 실상 나는 내 외로움을 말하고 싶었다. 마리우스와 꼬젯트가 만난 곳이 뤽상부르그 공원이었대. 워털루 전쟁은 정말 참혹했더구먼. 진보와 보수가 머리 터지게 부딪친 세월이었지. 근데 예전의 작가들은 어쩜 그렇게 입담이 좋고 어쩜 그렇게 해박했던거야. 그러게 말야. 요새 뭐 읽고 있어? 이반 데니소비치를 다시 읽고 있지. 참 거 좋은 작품이야. 그러게. 아무 플롯도 없이 그렇게 감동적인 글이 나왔으니 말야. 글이 아니라 사상이지. 이런 이야길 나눌 친구가 좀 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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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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