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가 북한 평양에 들어가 기적 같은 쾌거를 일궈냈다.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벌어진 2018 아시안컵 예선 B조에서 한국은 여자축구의 강호 북한을 따돌리고 내년 요르단에서 개최되는 대회 본선 출전권을 따냈다. 요르단 아시안컵이 2019년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FIFA(국제축구연맹) 여자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겸하고 있기에 아시안컵 본선 티켓을 따낸 이번 결과는 사실상 2019 프랑스월드컵 1차 예선을 통과한 것이다.
사실 이번 평양의 기적은 그 누구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한국 여자축구가 짧은 기간 안에 급성장을 이뤘지만 여자축구의 세계적 강호인 북한은 아직도 넘기 힘든 벽이었다. 북한은 3번이나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강호로 FIFA U-20(20세 이하) 월드컵에서도 이미 두 번 이나 우승한 팀이다. 지난해 파푸아 뉴기니에서 벌어진 U-20 월드컵에서 북한은 스웨덴, 브라질, 스페인, 미국, 프랑스 등 내로라하는 여자축구 세계 최강국들을 차례로 연파하고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성인대표팀을 기준으로 하는 FIFA랭킹은 북한이 10위, 한국이 17위로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는 숫자일뿐 체감 격차는 훨씬 컸다. 남북 맞대결에서 한국 여자축구는 2005년 동아시안컵에서 딱 한 번 이겨봤을 뿐 14번을 졌다.
지난 1월 여자 아시안컵 예선 조 추첨 결과 한국이 북한이 주최하는 B조에 떨어지자 한국 축구계에선 탄식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직전 대회 1~3위 팀인 일본, 호주, 중국은 본선에 직행하기에 이번 예선에 나서는 팀들 가운데 한국보다 강한 팀은 북한 밖에 없었다. 예선 4개조 가운데 북한이 있는 B조만 아니라면 어느 조에 가도 본선에 오를 자신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북한이 버틴 죽음의 조에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예선은 전 경기가 북한 평양의 김일성 경기장에서 벌어지기에 한 마디로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아오라는 과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 말을 윤덕여호가 입증해냈다. 윤덕여 감독은 일단 북한 원정이라는 험난한 과제를 받아들자 치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동안 추진해온 대표팀의 세대교체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이번 대회에서 A매치 100번째 출장으로 센추리클럽에 가입한 조소현 등 베테랑 선수들을 다수 소집했다. 심적 부담이 엄청난 평양 원정 남북대결에선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선수들의 존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 김일성 경기장이 인조 잔디구장임을 감안, 인조잔디가 깔린 목포국제축구센터에서 합숙훈련을 해 인조잔디 적응도를 높였고 북한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대비해 훈련장 곳곳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훈련시간 내내 귀가 따갑게 북한의 체제 선전 노래를 틀어 선수들이 현장 분위기를 사전에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전략적 접근도 치밀했다. 1위만이 본선에 오르는 상황에서 북한과 무승부를 이뤄낸다면 자연히 승부는 다른 팀들과의 골득실 싸움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첫 경기부터 최대한 다득점을 노리는 작전으로 나섰고 결국 북한에 골득실에서 3골 차로 앞서 목표인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집중력과 불굴의 투지였다. 조소현과 전가을, 김정미, 유영아 등 베테랑 선수들은 물론 장슬기, 이금민 등 어린 선수들까지 한 몸이 돼 쉬지 않고 몸을 던지며 싸웠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전이 끝난 뒤 몇 명의 선수들은 걷지도 못할 정도로 탈진해 업혀서 경기장을 떠났다고 한다. ‘미션 임파서블’을 이뤄내겠다는 선수들의 집념과 투혼, 그리고 코칭스태프의 치밀한 계획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평양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를 지켜냈다.
최근 한국축구는 남자 대표팀의 성적 부진으로 시끄럽다. 감독의 전략 부재와 선수들의 투지 및 정신력 결핍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따갑다. 여자축구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지원을 받는 남자 대표팀이 ‘호랑이굴’에 들어가 승전보를 전해온 여자축구의 투혼을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어 앞으론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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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부국장·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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