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가까이 전국뉴스의 조명을 받으며, 연방상원의 고된 인준 청문회를 통과한 닐 고서치 판사가 10일 드디어 연방대법관에 취임했다. 평균연령 70세인 현직 8명 대법관들에 비해 새파랗게 젊은 49세 루키 대법관이다. 그의 한 표는 비중과 영향력에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나 최고령의 대선배인 84세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의 한 표에 전혀 뒤지지 않겠지만 연공서열 철저한 대법원 적응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연방대법원 입성은 대부분의 법관들에겐 감히 꿈조차 꾸기 힘든 미 법조계 최고의 영예다. 그러나 신참에 대한 신고식이랄까, 허드렛일 떠넘기기는 일반 직장과 다를 게 없다. 지난 6년 막내 업무를 수행해온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그 잡무가 뉴스의 각광 속에서 자만해진 새 대법관을 “겸손하게 만드는 한 방법”이라며 신참에게 할 일을 유머러스하게 일러 주었다 :
첫째, 구내식당 메뉴를 잘 관리하라. (입맛 까다로운 대법관들에게) 수프가 짜지 않게, 초콜릿칩 쿠키는 예전처럼 맛있게. 둘째, 비공개회의에서 모든 대법관의 발언을 충실히 기록하라. 당신의 발언 순서는 맨 마지막이다. 셋째, 노크소리가 나면 당신이 중요한 발언 중이라도 벌떡 일어나 문부터 열어야 한다. 아무도 당신 대신 문을 열지 않는다. 대부분의 노크가 “아무개 판사님 안경 여기 있어요” “아무개 판사님 커피 가져왔어요”등 하찮은 용무라 할지라도.
대법관들이 비공개회의를 하는 컨퍼런스 룸은 보좌관도, 연구관도 들어갈 수 없는 대법원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그 성역의 일원으로 고서치의 공식 업무는 다음 주부터 본격 시작된다.
대법원의 금년회기는 거의 끝나 간다. 그러나 4대4 교착상태를 해소해줄 고서치의 취임은 중요한 케이스들에 당장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14개월 전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 사망이후 처음으로 9명 대법관 전원이 참석하는 법정이 열리기 때문이다.
고서치가 참석하는 첫 재판은 4월19일 ‘종교 차별’ 케이스다. 원고는 미주리 주정부가 교회학교에 운동장 재포장 기금 지원을 거부한 것이 종교적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주정부는 정교분리를 명시한 주 헌법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한다. 평소 친 종교성향을 보여 온 고서치가 참여하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미 전체 30여개 주가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하고 있어 그 파장이 상당히 클 것이다.
동성애 커플의 웨딩케이크 주문을 거부한 콜로라도 빵집주인의 ‘종교자유’ 케이스도 있고 캘리포니아의 총기규제법에 도전하는 소송도 있다. 종교자유와 총기는 보수와 진보가 팽팽히 맞서는 대표적 사안이어서 심의채택 여부에서부터 고서치 표의 향방이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 몇 달간 가장 관심을 끌어온 것은 고서치에게 달린 ‘트럼프 반 이민 행정명령’의 명운이다.
5월8일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제4 연방 항소법원에서 시작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이민명령 항소심은 3인 판사 심리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판사 15명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심리로 들어간다. 법무부가 국가안보 사안임을 강조하며 신속한 진행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항소심 판결이 언제 나오든, 누가 지든 대법원 상고는 거의 확실하다.
1월에 발동된 첫 이민명령은 항소심에서도 제동이 걸렸지만 트럼프는 대법원 행을 포기하고 3월초, 내용을 약간 수정한 두 번째 이민명령을 발동했다. 만약 대법원 심리 후 4대4 동수판결이 나올 경우 항소심 판결이 준용되어 이민명령이 아예 죽어버릴 수 있어서다. 그 교착상태를 풀어줄 고서치의 인준이 당시엔 시간상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트럼프에겐 새 보수 대법관인 고서치라는 강력한 ‘무기’가 생긴 것이다!
대법관 누구도 이민명령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지만 외부의 추정대로 진보와 보수가 4대4로 갈린 상태라면 이민명령의 앞날은 9번째 대법관 고서치의 결정에 따라 갈리게 된다. 트럼프의 기대대로 대법원 보수파에 날개를 달아 승소판결을 안겨줄 수도 있고, 비인도적·반미국적 행정명령에 ‘위헌’이라는 일격을 가하면서 사법부의 견제역할에 충실할 수도 있다.
예측은 쉽지 않다. 고서치의 지난 10년 항소법원 판결기록 중 이민관련 케이스가 드물어서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온라인 해설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잇’이 그의 이민과 고용차별 판결 기록만을 추려 성향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가 ‘놀랄 만큼 중도적’이었다.
미국에 두 번이나 밀입국했던 한 멕시칸 이민자에겐 자신을 오클라호마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일할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 있다 : 2013년, 추방보다는 체류신청 허용 규정이 우선한다고 판결해준 닐 고서치 판사다.
이 케이스 하나로 희망을 갖기엔 고서치는 강경보수 스칼리아와 가장 유사한 법관으로 분석된 보수파다. 그가 취임하면서 5대4의 보수 우위로 돌아간 대법원은 고령의 대법관들이 물러날 경우 극우보수로 치달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대법원만이 아니다. 현재 13곳 연방항소법원 중 9곳은 민주당 대통령들이 지명한 판사들이 다수인 ‘진보적’ 법원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향후 많게는 200명이 넘는, 어느 초선 대통령보다 많은 연방판사를 지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급법원도 ‘보수적’ 법정으로 바뀔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에 더해 이제 사법부까지 ‘친 이민’과는 거리가 먼 보수화의 정착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할 여유가 없다. 이민사회도 보다 근본적인 생존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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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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