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녹턴(야상곡) 등을 듣고 있으면 왠지 청량리 순대국 집이 떠오른다. 청량리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왜 일까? 아마 중학교 2학년 어느 겨울이었던 것 같다. 제사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 온 둘째 숙부님(작은 아버지)께서 청량리에 볼 일이 있다고 길을 안내하라고 하셨다.
대충 버스노선을 알고 있었기에 목적지에 내리니 내렸던 눈이 녹아 길은 질퍽거렸고 변두리의 낯선 거리가 마치 조선시대의 (재래)시장을 연상시키 듯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분주히 여기저기 찾아다니느라 춥고 허기지셨던지 작은 아버지는 어느 골목길 코너의 구수한 냄새를 따라 순대국 집으로 (나를 끌고)들어가셨다. 물론 그곳에서 무엇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눈이 내릴 것 같은 회색 하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분주한 분위기… 허름하고 서민적인 식당 그리고 시골 아저씨같은 숙부님의 약주 한 사발… 그것은 희미한 기억 속의 미세한 소묘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평화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어쩌면 살면서 그런 낯설고도 또 결코 낯설지 않은 서민적인 평화가 과연 몇번이나 있었을까? 인위적으로, 우린 무언가를 찾아 헤메고 나름대로 행복을 찾아 노력해 보지만 사실 진정한 평화는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또 찾아나선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길 읽고 거리를 헤매는 미아(의 초조함)처럼, 세상은 도시의 낯선 불빛, 낯선 사람… 낯선 풍경 속에 가려진, 어디가의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그렇게 멀고도 그리운… 꿈인지도 모른다.
어느 포근한 겨울의 풍경화같다고나할까… 아니 한 소년의 꿈처럼… 쇼팽의 음악은 시적이고 젊다. 쇼팽이 표현하는 눈부신 기교는 수많은 빛이 모아진 하나의 별빛… 바람이자 하늘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베이지역을 다녀갔다. 베이지역 신문(크로니클)은 이례적으로 조성진의 연주를 비중있게 다루고 그의 피아노 솜씨를 크게 칭찬했다. 조성진은 한마디로 피아니스트이기에 앞서 예술가라는 것이었다.
쇼팽 콩쿨에 1등한 者로서, 눈감고 악보하나 틀리지 않게 칠 수 있는 그런 테크닉의 달인으로만 보았다면 잘못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잘 연주했다는 뜻이겠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이라는 것이 길들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탄생해야된다는, 그런 깊이있는 분야라는 뜻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겠다.
조성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쇼팽(의 음악)을 자주 듣고 있다. 예전에는 쇼팽을 좀 멀리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쇼팽의 음악이 너무 시적이고 감상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현실이 그만큼 삭막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마치 쇼팽의 감상주의는 너무 먹기엔 지나치게 달콤하고 나른했다.
마치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속의 윤동주 시인처럼, 불행한 시대에서 시를 써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저주였다고 울부짖는 모습의 오버랩 같았다고나할까.
피아노의 시인, 요절한 천채… 불후의 피아니스트… 평가 또한 찬사치고는 다소 상투적으로 남아있는 쇼팽은 (살아생전) 그 스스로 (남에게)크게 평가받기를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손가락 가는대로, 마음가는대로, 그저 피아노를 치고 마치 일기 쓰듯 그렇게 피아노와 함께 살아갔던 쇼팽은 요즘말로 지 좋아서 한판 놀다간, 그저 사당패요 광대였을 뿐이었다. 광대에게 보내는 찬사… 그것은 매우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해, 그저 일기 한 권남긴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솔직한 자기 고백… 보이지 않은 사각에서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다. 한 명의 시인, 진정한 예술가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것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쇼팽의 음률은 (다소 탐미적이지만) 그치지 않는 끝없는 자기고백이 있다.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끝없이 수놓아지는 음의 고백들… 그것은 때로는 나그네의 눈물일 수도… 차 한잔의 고백이요, 너와 나의 애수… 삶에 대한 사랑과… 맑게 비추는 언어… 하늘과 바람과 별… 그 감동인지도 모른다.
<
이정훈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