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열고 전화기를 꺼내니 전화가 깨져 있다. 화면이 마치 사진으로만 본 알라스카의 오로라처럼 빨강, 분홍, 파랑, 보라, 예쁘게 휘황찬란하다. 깨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보이긴 하니 그냥 써야지 하는데 시시각각으로 오만 색깔이 너울지더니 이삼일 사이에 그만 깜깜해 졌다. 요즈음은 기술이 발달해 뒤가 구린 사람들이 감추려고 삭제한 문건들도 말짱 되살려 낸다고, 나쁜 짓 하고 오리발 내 봤자 소용없다고 하더니만 나는 깜깜해진 전화기를 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이 가게 저 가게 들러봐도 살릴 길이 없단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순간이다. 사실 나는 하루에 한 두 통 정도의 전화와 식구들끼리 언제 오냐, 지금 간다, 정도의 문자를 나눌 뿐 친구들에게도 제발 긴요한 일 외에는 카톡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고 다니는 터라 온 세상 사람들이 스마트폰 중독에 걸린 세상이라고 떠들어도 나만은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이 세태를 피해가고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전화가 깨진 타이밍이 공교롭게도 누가 산호세에 올 일이 생겼다고, 며칠 있다 만나자는 소식에 정말 반갑네요. 그럼 곧 뵈요., 하고 답을 보낸 직후였다.
깜깜해진 전화를 붙잡고 쓸어보고 만져보고 안절부절을 했다. 단 한순간도 전화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사는 요즘 젊은 애들이 왜 전화가 없으면 멘붕이 되는지가 이해될 지경이었다. 와중에 일생을 열심히 자기 일에 온 힘 다해 작업하는 어느 예술가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그 분은 아예 스마트폰이란 게 없다. 문자를 보내는 것도 모른다. 그런데도 일생동안 동료 예술가들과 진한 유대감과 격려와 사랑을 나누며 산다. 가족과 몇 명의 진실한 친구, 그리고 자기 일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그는 깊은 예술관과 많은 인문학 지식이 있어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도 얼른 집으로 뛰어가서 뭔가 창조적인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게다가 내가 이즈막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당장에서 지옥 편의 첫 소절을 호소력 있게 낭독까지 한다.
나는 기껏 책읽기 하나로 기분 뿌듯했는데 와, 한 수 위! 뭔가를 많이 안다는 건, 그리고 타인에게 그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영감을 주는 사람인 된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삶인가.한 통의 전화에도 들떠서, 그 잘난 전화기가 방금 망가졌다고 스트레스 받는 내 앞에서, 생전 스마트 폰이라곤 가져 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삶과 예술은 청아했다. 그 분이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어느 화가가 일생을 정말 피 말리듯 열심히 작업을 했단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눈에 보여지는 작품이라곤 남겨지지 않았기에 주위에선 그를 행위 예술가로 부르기로 했단다. 그 얘길 들으니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일이 떠올랐다. 그 시절, 친구들과 둘러 앉아 종종 밤새도록 그림과 화가에 대해 난도질하고 씹으며 말로 작살을 냈었다. 그래놓고는 제 풀에 머쓱해져서 우린 개념예술가라고 자조적 자아비판을 했었다.
좋은 그림 그리는 것도 어렵고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있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어렵다. 따지고 들자면 우리 모두 인생의 행위 예술가나 개념 예술가 아닐까? 사순절이라고 성당에서 특강을 준비했는데 그게 잠심에 관한 거란다. 뭔가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그 단어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거란다.
참 말이 쉽지 .... 그런데 그것도 자꾸 훈련하면 이룰 수 있는 일이란다. 남이 내게 느닷없이 욕설을 퍼부어도 아니면 부풀린 칭찬이나 아첨으로 다가와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마음 자세. 기쁜 일이 일어나든 실망할 일이 일어나든 잔잔한 물처럼 고요한 심상. 이런 마음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건데, 그런 사람을 보통 도사라 칭하는거 아닐까? 아, 멀고도 험한 득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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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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