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 학년 때 였을 것이다. 조회를 빼먹고 교실에 앉아 소설책을 보고 있다가 들켰다. 수학을 가르치시는, 멋없게 생기신 분이었는데 야단을 치시려나 했더니 그냥 내 소원이 뭐냐고 물어 보셨다. 아, 드디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을 갖고 계신 분을 만났는가 보다, 잠깐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대답했다. “책으로 꽉 찬 방에서 하루종일 책만 읽으면서 살고 싶어요.” 대답만 잘 하면 행여 소원을 들어주시는 줄 알았더니만 그냥 고개만 끄덕이실 뿐 애타는 나의 소원은 비누방울처럼 쓸쓸히 사라져 갔다.
최근 성당에서 도서실을 좀 제대로 살려보자는 말이 나와 느닷없이 도서관 관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의 모든 기운이 도와준다던 어느 사람의 말이 정말 사실인걸까? 반 세기 전의 간절한 소망을 우주의 기운이 이제야 접수했나? 혼자 웃었다. 도서관의 이름으로 할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를 하다 고전 읽기, 창작 교실, 문학 강연 등을 하면 어떨까, 또 꿈을 꿨다. 그러면서 이 꿈이 또 다시 비눗방울처럼 헛된 꿈으로 날아가 버리지 말기를 우주의 모든 기운에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고전 읽기의 첫 번째 책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자고 하니 많은 이들이 그렇게 어려운 걸 왜 읽냐고, 절대로 읽어낼 수 없다고, 좀 살살 하자고 말린다. 죽이 맞는 친구 하나를 붙들고 만약 아무도 안오면 우리 둘이 읽자고 배수진을 치고, 함께 읽고 싶으신 분들 모이라고 했더니, 어마나, 한 분 두 분 모이기 시작하더니 무려 자그마치 열 다섯 사람이 모였다. 전부들 눈들을 반짝이며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읽는다. 모두들 제목만 알았는데 드디어 죽기 전에 읽을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 하신다. 아마도 이 모임의 이름은 ‘살아있는 김에’로 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데스밸리를 좋아해 벌써 여러 번 갔었고 또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가게 될 터인데 그 곳에 갈 때마다 Dante’s View 라는 곳을 대하면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이름을 부친다는 건 정말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표징일 터이다. 단테의 신곡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아하, 이곳이 단테가 생각했던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광경과 일치하는 곳이구나, 하는 맘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런 이름을 부칠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름도 클라식한 단테스뷰! 지적 호기심마저 고취 시키는 그 곳을 바라보며 죽기 전에 꼭 읽을 기회가 있기를 바랬더니만!
그런데 함께 읽겠다고 오신 분 중에 88세 되신 어르신이 계신다. 모두들 책을 주문해 장만하는데 그 분은 이미 갖고 계시던 당신의 책을 가져오셨다. 신곡을 읽고 싶다고 며느리에게 이야기했더니 며느님이 아마존에 주문해 주었단다. 얼마간 혼자 읽으셨는데 아무래도 혼자 읽기 힘들어 잠시 쉬고 있는 판에 신곡을 함께 읽는 모임이 생겼다 해서 오신 거란다. 우리 모두 아직 가보지 못한 세월을 살아보신 분, 우리 모두가 결국은 가야하는 그 세월을 이미 살아내신 분, 깊고 싶은 산중에서 행여 길을 잃은 건 아닐까 불안 불안 한 심정일 때 저만치 나뭇가지에 나붓이 묶여있는 붉은 헝겊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그 안도와 위안을 우리 모두는 그 분을 보면서 가슴에서 뿜어나오는 환성을 들은듯 느꼈다.
어렸을 땐 할머니들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로 태어나는 줄 알았다. 엉겹결에 나도 이 자리에 도달해 뒤 돌아보니 내 늙은 육신 안에 한살박이 어린 애, 고뭇줄하고 공깃돌 노는 꼬맹이, 이성에게 눈 흘기는 어색한 청춘, 팍팍한 현실속에서 울고 싶은 젊은 처자의 모습이 조각조각 남아 주름진 몸피 뒤에 살그머니 몸 감추고 밖의 세상을 빼꼼히 내다보고 있다. 젊은 이들이여! 부디 우리의 모습을 주름지고 꼬부라진 딱한 모습으로만 보지 말아다오. 우리 안엔 그대들이 갖고 있는 푸르른 열정과 함께 그대들은 아직 갖지 못한, 자연과 세월에 순응하는 무연한 마음이 보석되어 간직되어 있다오.
바로 고전 속에도 그 보석이 있는 거 아냐?
<
최 정(화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