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상 ‘문라이트’. 오른쪽이 조연상을 탄 마헤르샬라 알리.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지난 26일 할리웃에 있는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한 번 놀라고 다시 또 한 번 놀란 깜짝 쇼였다. 처음 놀란 것은 작품상 수상작으로 발표된 ‘라 라 랜드’(La La Land)가 상을 반납해야 한 것이며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라 라 랜드’ 대신 작품상을 탄 영화가 시상시즌 내내 언더 독으로 지목받던 ‘문라이트’(Moonlight)라는 점이다.
라 라 랜드’의 제작자가‘문라이트’가 진짜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운데가 작품상 수상작 발표자인 워렌 베이티. 오른쪽이 사회자 지미 킴멜.
오스카 사상 초유의 해프닝이자 기괴하다고 해야 할 실수인 ‘라 라 랜드’의 작품상 반납은 이 상을 발표한 할리웃의 베테런 워렌 베이티와 페이 더나웨이(둘은 미 경제공황 시대 연인 은행강도였던 바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의 실화 ‘바니 앤 클라이드’에서 공연했다)가 작품상 이름이 적힌 봉투 대신 ‘라 라 랜드’로 여우주연상을 탄 엠마 스톤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들고 나와 엉뚱한 작품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모두 14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오른 ‘라 라 랜드’는 작품상 수상작이 발표되기 전까지 여우 주연과 감독(32세의 데이미언 차젤은 오스카 사상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다) 및 음악상 등 이미 5개 부문에서 상을 탄데다 유력한 작품상 수상작 후보여서 더나웨이가 호명했을 때 참석자들은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영화의 제작자들과 감독과 배우 등이 무대에 오르고 제작자들이 수상 소감을 끝냈을 때 뒤 늦게 ‘문라이트’가 진짜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장내는 순간 아연실색한 사회자 지미 킴멜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경악에 질린 표정과 침묵에 이어 ‘문라이트’에 대한 박수갈채로 채워졌다.
참석자들에게 “이것은 농담이 아니고 ‘문라이트’가 진짜 작품상 수상작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라 라 랜드’의 제작자 중 한 사람이었고 당황한 베이티는 자신의 실수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처음에 수상작이 바뀌었을 때 킴멜이 하는 짓궂은 농담인줄 알았다.
시상식 전만해도 이날 쇼는 ‘라 라 랜드’의 독무대가 될 것으로 예견됐으나 이 영화는 6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라 라 랜드’는 옛 할리웃에 바치는 헌사로 주연상을 탄 엠마 스톤은 할리웃에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배우 지망생으로 나온다. ‘라 라 랜드’는 감독과 여우주연 외에도 주제가 및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상 등도 탔다.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은 오스카 사상 보기 드문 언더 독의 승리다. 제작비 달랑 500만 달러짜리 이 영화는 마이애미 인근의 달동네에서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와 둘이 사는 동성애 흑인 소년의 성장기다. 달빛처럼 아름답고 자비로운 영화이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 많지 않은 소품이어서 그 누구도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탈 것으로 예견하지 못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올 해 골든 글로브 작품상(드라마)을 탔는데 이 날 작품상 외에도 조연 남우(마헤르샬라 알리)와 각색상(연극이 원작)을 탔다. 외양으로는 터프하나 인자하고 친절한 마음을 지닌 드럭 딜러로 나온 알리는 최초의 무슬림 오스카 수상자가 됐다.
여우조연상은 덴젤 워싱턴이 퓰리처상을 탄 오거스트 윌슨의 연극을 원작으로 감독하고 주연한 ‘울타리’(Fences)에서 가정의 독재자요 허세를 부리는 피츠버그의 쓰레기차 용원으로 나오는 워싱턴의 아내로 깊고 폭 있는 연기를 한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탔다. 이로써 ‘문라이트’의 수상과 함께 이날 오스카 시상식은 보기 드문 흑인 배우들과 영화인들의 잔치가 됐다. 아카데미는 당분간 ‘오스카는 온통 백색이다’라는 비난을 안 받게 됐다.
남우주연상은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에서 미 북동부의 소도시 맨체스터에 사는 비극적 과거를 지닌 아파트 막일꾼으로 나온 케이시 애플렉이 탔다. 이 부문에서는 시상식 직전까지 애플렉과 덴젤 워싱턴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케이시는 벤 애플렉의 동생으로 이로써 형제가 나란히 오스카 수상자가 됐다. ‘바닷가의 맨체스터’는 남우주연상 외에도 감독인 케네스 로너간이 각본상을 탔다.
이날 가장 감동적인 것은 외국어 영화상을 탄 이란 영화 ‘세일즈맨’(The Salesman)이었다. 이 영화는 이미 ‘이혼’(A Separation?2011)으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아스가 화라디 감독의 의심과 무기력감 그리고 질투로 인해 분열되어 가는 부부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화라디는 이 날 트럼프의 이란을 포함한 무슬림 7개국 사람들에 대한 미 입국금지 행정명령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에 불참했다. 수상 소감은 이란의 최초 우주인인 아누쉐 안사리가 대독했는데 화라디는 “‘우리’ 대 ‘우리의 적’이라는 사고방식은 공포를 조성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와 함께 단편 기록영화상을 시리아의 내전 피해자들을 목숨을 걸고 구조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을 그린 ‘하얀 헬멧’(The White Helmets)이 탄 것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트럼프의 신고립주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여러 참석자들 이 가슴에 미 민권연맹(ACLU)을 지지하는 푸른 리본을 달고 나왔다.
이날 시상식에서 ‘O.J.:메이드 인 아메리카’(O.J.:Made in America)가 기록영화상을 탄 것도 다분히 이색적이다. O.J. 심슨 재판과 흑백갈등을 비롯한 미국의 전반적인 사회 및 정치 문제를 다룬 7시간 40분짜리 영화다.
이 영화는 TV용으로 제작돼 ABC와 ESPN에서 방영했는데 극장에서도 상영돼 수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와 TV의 한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화영화상은 ‘주토피아’가 탔다. 이 날 상은 전체적으로 고루 주어졌다.
시상식 전만해도 사회자 지미 킴멜과 진보적인 할리웃의 영화인들이 사회를 보고 수상 소감을 통해 극우파인 트럼프에 대한 독한 말을 쏟아 놓을 것으로 기대됐으나 쇼는 생각보다 훨씬 온건한 무드로 진행됐다.
성공적으로 사회를 잘 본 킴멜은 트럼프에 대해 툭툭 건드리는 식의 농담을 했을 뿐이고 수상 자들도 대부분 정치적 발언을 피해갔다. 간혹 있은 정치적 발언도 메릴 스트립이 올 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생애 업적상을 받으면서 말한 반 트럼프 발언에 비하면 온순했다. 킴멜은 트럼프 보다 이 날 ‘바닷가의 맨체스터’의 제작자로 참석한 맷 데이먼을 계속해 농담거리로 삼았다.
이날 쇼 중에 재미있었던 것은 할리웃 관광객들이 쇼가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돌비극장 안으로 안내 받아 들어와 앞쪽에 앉은 메릴 스트립, 덴젤 워싱턴, 라이안 가슬링 및 니콜 키드만등과 악수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워하는 모습. 워싱턴은 약혼한 남녀관광객 한 쌍을 즉석에서 결혼시키는 주례 노릇을 해 박수를 받았다.
4시간이 넘도록 진행된 쇼는 킴멜의 재치 있는 사회로 잘 진행됐으나 시청률은 총 3천4백40만 명이 본 작년에 비해 4%가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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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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