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힘들게 보였던 시험대를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28일 밤 연방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정치 입문 후 처음으로 ‘대통령답게’ 보인 것이다!
다음날인 어제, 집권 초기 한 달여를 혼돈 속에서 휘청거린 대통령은 드물게 상쾌한 아침을 맞았을 것이라고 CNN은 전한다. CNN의 여론조사 결과 무려 78%가 새 대통령의 첫 의회연설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으며 앙숙인 주류언론 대부분까지 호평을 내놓았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의 첫 아침, 트럼프 자신도 “땡큐”라는 한 마디 트윗으로 품위 있게 화답했다.
선거기간 내내 막말을 쏟아내고, 취임사에서까지 ‘미국의 살육’이란 섬뜩한 어휘를 동원하며 암울한 공포와 분열 조장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본격적 통치로 들어가는 길목인 이번 연설에선 신중하게 다듬어진 어조로 단합을 호소하며 낙관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며칠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쳐가며 연습을 반복한 치밀한 준비와 즉흥적 충동을 억누르고 원고에 충실한 그의 예상 밖 절제력의 결과였다.
게스트 초청도 성공이었다. 이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대통령이 지난달 예멘 대테러작전에서 희생된 해군특수부대 네이비실 대원 라이언 오원스 중사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였다. 그는 “투사로, 영웅으로 숨진 오원스의 레거시는 영원에 새겨질 것”이라고 추모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흐느끼는 미망인에게 기록적인 2분11초의 긴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이 장면을 CNN의 진보해설가가 트윗으로 전했다 - “그 순간,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고 그의 강경정책까지 완화된 것은 아니다.
이번 연설의 관전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선동적 스타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둘째, 그는 구체적 정책을 밝히며 의회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전자는 성공적이었지만 후자는 미흡했다는 것이 보수·진보 언론들의 공통된 평가다.
이날 밤 그가 제시한 주요정책의 목표는 장황하고 야심찼다 :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고 대체할 헬스케어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가입이 쉬워지며 보험료는 내려가고 보험커버는 좋아진다. 미국 기업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경쟁에 뒤지지 않도록 법인세가 대폭 낮아지고, 중산층도 대규모 감세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국방예산의 획기적 증액으로 “군에는 용감한 투사들이 충분히 받을만한 자원이 주어질 것”이며 1조 달러 인프라 투자로 “무너져가는 기간시설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국토를 가로질러 빛나게 될 새 도로, 다리, 터널, 공황, 철도로 대체될 것”이다. 임금은 인상되고, 공장과 탄광은 재가동되며,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 유급가족휴가와 차일드케어, 여성건강, 빈곤층 자녀의 교육 지원이 보장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남부국경에 ‘위대하고 위대한 장벽’의 건설과 함께 진행될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트럼프토피아’란 표현으로 꼬집을 정도의 ‘이상향’이다. 그러나 그의 제안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다 - “How“,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 것인가. USA 투데이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한 마디로 트럼프 제안의 신뢰하기 힘든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이미 연 5천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 “적자를 폭발시키지 않고는” 가능할 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지금까지 강조해온 정책들을 재포장했을 뿐 의회가 기대해온, 보다 구체적인 사안이나 명확한 방향은 이번에도 제시되지 않았다. 더 아리송한 것은 이민정책이다. 연설 몇 시간 전 트럼프는 뉴스앵커들과의 오찬에서 범죄 전과가 없는 서류미비 이민자 수백만명의 합법신분 취득 가능성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막상 연설에선 이에 대한 언급 없이 불법체류 범죄자 단속강화를 재천명하며 가족이민 아닌 능력을 우선시하는 메릿제 채택을 촉구했다. 현 이민제도의 일대 수술을 예고하는 것인지 추측만 분분할 뿐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새 대통령이 독단 처리하는 행정명령 기간을 대충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의회와 협치를 시작해야 할 때다.
의회의 양극화가 얼마나 더 심해졌는지는 이날 밤 연설장의 분위기에서 한눈에 드러났다. 공화당 의원들은 작정한 듯 계속 기립박수를 보냈고 민주당 의원들 역시 작정한 듯 계속 시큰둥한 표정으로 박수에도 인색했다. “사소한 싸움은 뒤로 할 때”라며 단합과 타협을 촉구한 트럼프의 웅변이 무색하게 민주당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트럼프의 도전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무조건 반대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민주당 설득만이 아니다. 공화당의 만장일치 지지도 기대하기 힘들다. ‘트럼프의 정당’이 되어버린 듯한 공화당도 들여다보면 아직 내분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하는 트럼프 정책들에 대한 당내 재정보수파의 반발은 이미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정책은 의회가 법안으로 통과시키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당이라도 밀고 당기며 계산하고 타협한다. “대통령다운” 연설에 박수갈채와 함께 “홈런!”이라고 극찬을 보낸 공화당 지도부이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돈 쓰기를 계속 고집하는 대통령 대신 국가 재정위기 책임까지 기꺼이 지려고 할까.
‘대통령답게’ 보이는 트럼프가 언제까지 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 받은 78%라는 높은 점수를 그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테니 오래 갈 것인지, 어쩌다 하루 밤의 반전으로 끝날 것인지는 앞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 결과에 관계없이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새로운 시험대 앞에 서고 있다 - 그는 야심찬 정책의 입법화를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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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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