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혹 데이’는 매년 2월 2일 열리는 미국 고유의 명절이다. 이날 들쥐를 닮은 그라운드혹이란 동물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이상 계속되지만 날이 흐려 그림자를 보지 못하면 봄이 춘분 전에 온다는 속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행사는 1993년 나온 ‘그라운드혹 데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해졌다. 빌 머리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에서는 ‘그라운드혹 데이’가 끝없이 반복된다. 처음에는 똑같은 일의 반복에 절망하던 주인공은 이를 자기 개선의 기회로 삼아 오만함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제서야 저주는 풀리고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미국 정치 역사에서 ‘그라운드혹 데이’를 연상시키는 사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오바마케어 폐지를 위한 공화당의 노력이 아닐까. 2009년 버락 오바마가 단 한 표의 공화당 도움 없이 전국민 의료보험인 ‘오바마케어’를 통과시키자 그 폐지는 공화당의 종교적 신앙이 됐다.
오바마 집권 8년 동안 공화당이 다수를 장악한 연방 하원이 이 법 폐기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60번이 넘는다. 하도 여러번 통과시키다 보니 작년에는 공교롭게 ‘그라운드혹 데이’인 2월 2일 통과시켰다. 이날 백악관 대변인인 조시 어니스트는 “공화당은 오늘 60번째 오바마케어 폐지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마치 영화 ‘그라운드혹 데이’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라운드혹 데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숱한 공화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바마케어는 건재하다. 아무리 의회가 통과시켜 봐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효력이 없다. 지난 8년 동안 대통령은 오바마였기 때문에 이것이 법제화될 가능성은 어차피 제로였던 셈이다.
지난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오바마케어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들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기가 당선되면 취임 첫날 이를 폐지하고 보다 싸고 보다 좋은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취임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바마케어 폐지 소식은 들리지 않고 어떤 대체안이 마련될 것인지도 감감 무소식이다.
미국인들이 오바마케어에 불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만의 주 원인은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보험료는 나날이 오르는데 자기가 부담해야 할 부분은 엄청 많은 나쁜 보험이라는데 있다. 오바마케어 평균 보험료는 매년 25%씩 오르는데도 보험사들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잇달아 탈퇴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 없이 오바마케어를 폐지할 경우 그 덕에 보험을 갖게 된 2,000만 명이 혜택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 중하류층이다. 대안 없이 이들의 보험을 뺏는 것은 트럼프나 공화당에게 있어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대안 없는 폐지가 불가능한 이유다.
그렇다고 트럼프 공약대로 모든 국민에게 질은 좋으면서 값싼 의료 보험을 들게 해주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바마케어는 기존 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보험사 입장에서는 치료비가 많이 드는 환자를 강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바마케어는 고소득자에 대한 증세와 저소득층에 대한 보험료 지원,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보험 강제 가입을 통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메우려 했다. 이런 조항들이 오바마케어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지만 이는 기존 병력자 가입 의무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요소다. 그럼에도 기존 병력 때문에 보험에 들지 못하던 사람들은 대거 몰리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가입을 피하는 바람에 보험사들은 적자가 누적돼 오바마케어 기피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대대적인 감세를 약속하고 있는 트럼프가 무슨 수로 전국민 의료 보험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단 말인가. 미국은 현재 메디케어와 소셜 시큐리티 등 사회 복지 예산과 국채 이자로 국가 예산의 60% 이상을 쓰고 있다. 10여년 후면 이 숫자는 80%로 늘어난다. 이대로도 재정파탄이 뻔히 보이는데 값싸고 질좋은 전국민 의료 보험 예산을 추가지급할 여력은 없다. 트럼프 의료 보험 공약을 믿은 유권자들은 실망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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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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