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근거로 사람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고교생의 당찬 질문에 연방하원의원은 대답을 얼버무렸고 장내엔 야유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안도 없이 오바마케어를 폐지하려는 거요? 그건 당신들 모두가 죽음의 패널이 되는 거요” “일 좀 제대로 하시요!” “우린 바보가 아니요…진실을 말하시오” 거친 항의로 소란스러워진 곳곳의 회의장에서 연방의원들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둘러 빠져나가기도 했다.
새해 1월3일 출범한 제115대 연방의회의 첫 정기 휴회인 이번 주, 공화당 의원들의 지역구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의 풍경이다. 분노로 뜨거운 분위기가 8년 전 오바마시대에 들끓었던(그래서 당시의 ‘민주당 천하’를 마감케 했던) 티파티 반란의 타운홀을 연상케도 한다.
백악관과 연방 상하원을 다 장악한 ‘공화당 천하’의 시대에 첫 번째 귀향이지만 상당수 공화의원들은 금의환향은커녕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유권자들의 성난 추궁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논란 많은 이민행정명령에서 오바마케어 폐지, 러시아커넥션, 잡음 계속되는 내각 인선에 이르기까지 유권자들의 불만은 대부분 트럼프행정부 폭주의 산물이다. 사실 ‘트럼프 충격’에 황당하기는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언행에 놀라지 않는 공화당 의원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한 의회관계자는 말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통역이라도 된 듯이 ‘우리당 대통령’의 파격 언행을 워싱턴 용어로 합리화시키며 옹호해야 하는 것이 공화당 의원들의 현재 입장이다.
트럼프와 공화당 의회의 관계를 ‘정략결혼’으로 LA타임스는 비유한다. 특히 공화당 지도부는 오랫동안 갈망해온 보수 어젠다들의 입법화를 위해 예측불허 트럼프의 혼돈의 데뷔를 참아왔다. 협조해가면서 트럼프의 극단적 정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해가겠다는 확신도 있었다.
의회에 사전 통보조차 안 해 상하양원 전체를 분노케 한 이민행정명령도 “대통령에겐 국가안보의 책임이 있다”라며 지지를 표했고 민주당이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내각 지명자들의 인준도 성공시켰으며 미숙한 처리와 계속되는 혼란을 새 행정부의 ‘성장통’이라고 감싸 안았다.
요즘 그러나, 이 새로운 파트너십에 경색 기미가 보이고 있다. 트럼프 팀의 러시아 연계의혹, 백악관의 끊이지 않는 드라마, 일일 브리핑이 되어버린 대통령의 트윗과 그 후폭풍, 거기에 2월초부터 가시화된 들끓는 타운홀까지, 정신없는 상황에 의원들의 불안과 불만이 증폭되면서 정략결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수퍼 파워를 장악한 새 공화당 주도 의회가 개원 50일이 넘도록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다. 선동적인 트럼프의 언행이 뉴스의 조명과 전국의 화제를 독차지 하면서 정작 주요 과제들인 오바마케어 폐지에 이은 헬스케어 개혁과 세제개혁, 정부지출 삭감 등은 진전을 꾀할 기회조차 못 가지고 있다.
트럼프 취임 며칠 후 기세 좋게 첫발 딛었던 오바마케어 폐지는 근처에도 못 갔고 대안 마련은 당내 이견으로 좌절된 채 갈 길이 멀다. 초당적 타협이 기대되는 기간시설법안은 아직 언급도 되지 않았고 세제개혁과 지출삭감 등 어느 것 하나 구체적 법안작성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트럼프가 천명한 장벽건설과 불법이민 단속강화의 예산대책도 확실치 않은 상태다.
2009년 오바마 취임 후 이 무렵, 당시 민주당이 상하원을 다 장악했던 연방의회는 내각인준을 거의 마쳤었고, 1조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안을 통과시켰다. 남녀임금차별 금지법은 대통령 서명까지 받았고, 아동건강보호법이 확대되었으며, 헬스케어개혁법과 금융규제법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나 금년 공화당 의회는 아직도 내각 인준 씨름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오바마행정부의 기업규제 해제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을 뿐 자신들의 ‘비전’ 실현엔 아직 다가가지도 못 했다. (아, 한 가지 있긴 하다. 정신질환자의 총기소유 금지정책을 죽여버렸다!)
공화당 지도부는 “우린 200일 플랜을 순서대로 진행 중”이라고 해명하지만 주요입법 처리에서 공화당과의 일전을 별렀던 민주당에서 “지루하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막강 공화당 의회는 요즘 답보상태다.
무엇 때문인가. 캠페인 때부터 구체적 정책도, 입법계획도 없었던 트럼프 백악관이 일관된 방향제시를 못하는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고, 공화당 의원들이 트럼프를 두려워해 나서기를 꺼려하는 탓이라고 뒷이야기도 있다.
“공화당 의회는 집단적 결정에 도달한듯하다 : 대통령이 어떤 황당하고 과격한 주장을 해도 맞서지 말고 수용하자. 오랫동안 유보되어온 보수법안들을 그의 서명으로 입법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큰 승리다…” -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 러시아커넥션 의혹도 형식적 조사로 넘어가려는 것일까. 오바마케어를 폐지시킨 후 불만 없는 헬스케어개혁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이슈는 교육이고, 누가 만들든 패배로 가는 지름길은 헬스케어개혁”이라고 한 베테랑 여론조사가는 오래 전 경고했었다.
1842년 이후 미국의 여당은 단 3번을 제외하고 모든 중간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을수록 잃은 의석수가 많았다. 영원한 다수당은 없다는 뜻이다.
수퍼 파워를 손에 쥐고도 움직이지 않고(혹은 못하고)있는 공화당의 시계는 2018년을 향해 ‘재깍, 재깍, 재깍’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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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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