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 수술 후 사망률 더 낮고 뇌졸중·심부전 등 회복 빨라”
최근 몇 년 새 연구결과 잇달아
▶ 뚱뚱할수록 영양상태 좋아 “병에 걸려도 잘 견뎌” 주장
우리나라 비만 기준이 낮아 비만 양산 ‘착시’탓 돌리기도
'마른 몸은 위험하다’. 광고 문구다. 실제로 마른 사람보다 적당히 뚱뚱한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비만의 역설(obesity paradox)’이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다. 과체중인 사람이 빼빼 마른 사람보다 사망위험이 낮다는 조사결과도 계속 나오고 있다. 과체중인 사람이 암 수술 후 사망률이 낮고, 뇌졸중에 걸려도 회복력이 빠르며, 심부전에도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비만 전문가들은 “몸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이 근육인데 근육 많은 과체중인 사람이 빼빼 마른 사람보다 건강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만을 측정하는 기준, 즉 체질량지수(BMI)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살찌면 오히려 건강하다?
보통 비만 기준으로 BMI가 쓰인다. BMI는 몸무게(㎏)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다. 정상 체중(18.5~22.9), 과체중(23~24.9), 비만(25~29.9), 고도 비만(30 이상), 저체중(18.5 미만)으로 구분한다.
살찐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건강에 좋다는 ‘비만 패러독스’는 1990년대부터 서구에서 간간이 나오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우리나라도 이런 연구결과가 슬슬 나왔다. 성기철 강북삼성병원 순환기내과 교수팀은 2002~2013년 건강검진을 받은 16만2,194명을 대상으로 BMI에 따른 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저체중인 사람의 전체 사망률이 정상체중인 사람보다 53% 늘었고,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 사망률은 정상체중보다 23% 줄었다고 했다. 이 결과는 암, 심혈관질환과 같은 질병에 의한 사망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장병 환자가 과체중이거나 가벼운 비만이라면 저체중보다 예후(병 치료 뒤 경과)가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노정현 인제대 일산백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대한비만학회지 최근호에 기고한 리뷰 논문에서 “심혈관 환자의 비만 지표(BMI-체지방-허리둘레-중심비만 등)가 높을수록 심혈관 질환의 예후가 더 좋았다”고 했다.
몸이 적당히 비만하면 심부전을 앓아도 생존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2만8,209명을 대상으로 한 메타분석에선 정상 체중 심부전 환자보다 과체중-비만인 심부전 환자의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각각 19%, 40% 낮았다. 하지만 고도 비만(BMI 40 이상)이면서 심부전인 사람에겐 비만 패러독스가 나타나지 않았고 예후가 오히려 나빴다.
위암에 걸려도 과체중인 사람이 저체중이거나 정상체중인 사람보다 생존율이 더 높았다. 박재명ㆍ송교영ㆍ이한희 서울성모병원 교수팀이 위를 잘라낸 위암 환자 1,905명의 몸무게와 수술결과를 비교해보니 저체중 위암 환자 5년 생존율은 69.1%, 정상체중은 74.2%, 과체중은 84.7%였다. 송 위장관외과 교수는 “위암 환자는 수술 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므로 BMI가 높으면 생존율도 높아지는 것을 추정된다”고 했다.
65세 이상 고령인은 살찔수록 뇌졸중이 나타나도 회복력도 빨랐다. 김연희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 교수팀이 국내 9개 대학병원에서 2012 1월~2014년 10월 급성 허혈성 뇌졸중을 진단 받은 18세 이상 성인 남녀 2,057명을 분석한 결과, 65세 이상 고령인 환자에서 고도비만그룹(37명)이 비만그룹(326명)이나 과체중그룹(316명), 정상그룹(391명), 저체중그룹(62명)보다 일상생활 능력이 빨리 회복했다.
마른 사람이 탄산음료를 마시면 비만인 사람보다 잇몸병에 걸릴 위험이 더 높다고 한다. 서울성모병원ㆍ고대구로병원이 20, 30대 5,500여 명의 비만도에 따라 탄산음료 섭취빈도와 구강상태를 비교 분석한 결과, 마른 사람이 탄산음료를 1주일에 2차례 이상 마시면 잇몸병 위험이 52% 증가한 반면, 비만인 사람은 잇몸병 위험이 줄었다. 박준범 서울성모병원 치과 교수는 “뚱뚱한 사람이 맷집이 좋은 것처럼 탄산음료 같은 것이 입 안에 들어왔을 때 세균이나 치주염 등에 더 잘 저항하는 것 같다”고 했다.
좋은 영양상태 때문? 엄격한 비만 기준 탓?
아직 비만의 역설에 대한 메커니즘이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가설에 불과한 실정이다. 아직까지 비만이 수명을 줄인다는 것이 대세인 셈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이 지난해 세계적인 의학저널 ‘란셋(Lancet)’에 밝힌 45년에 걸쳐 32개국 239개 연구의 1,060만 명 자료를 분석한 결과, 미국ㆍ유럽에서 발생한 조기 사망의 각각 5건 중 1건과 7건 중 1건이 과체중으로 유발됐다. 연구팀은 “평균적으로 과체중인 사람과 중등도 비만인 사람은 기대 수명을 각각 1년, 3년 정도 줄고, 뚱뚱한 남성은 특히 더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비만의 역설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다. 한 가정의학과 교수는 “뚱뚱한 사람이 영양상태가 더 좋아 병에 걸려도 더 잘 견디기 때문에 비만의 역설은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사망률이 높은 암, 폐결핵 등 소모성 질환(에너지를 많이 쓰는 질환)에 걸리면 체중이 줄어드는데 이 때문에 통계적으로 과체중인 사람이 마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비만 기준이 낮아 실제로 정상인 사람이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진단되면서 생긴 착시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국가 빅데이터를 이용한 전향적인 대규모 연구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BMI 구간이 세계보건기구(WHO) 아시아ㆍ태평양 기준으로 과체중에 해당되는 BMI 22.5~25.0이라는 사실을 들어 비만 기준(BMI 25 이상)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의 식습관이 서구화되고, 키도 서구와 비슷하게 커져 우리나라가 적용하고 있는 아시아ㆍ태평양 비만 기준(BMI 25 이상)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비만 기준 정도(BMI 27.5 이상, 미국 비만 기준은 BMI 30 이상)로 높여야 한다” 주장했다.
조정진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검진학회에서 제시한 비만 기준(BMI 남자 27.7, 여자 26.1 이상)처럼 연구를 통해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유순집 대한비만학회 이사장(부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도 “BMI라는 숫자 하나로만 비만 진단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며 “비만 기준에 복부비만 등의 수치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황희진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비만건강학회 총무이사)는 “최근 연구결과 추이를 볼 때 ‘근육 없는 저체중보다 근육 많은 과체중이 낫다’는 게 결론”이라며 “근육이 많으면 잘 넘어지지 않아 낙상을 당하지 않고, 혈당 조절에 허벅지나 종아리 근육이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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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익 의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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