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을 읽었을 때가 16살이었다. 화자로 나오는 여자아이가 재치있고 맹랑하고 조숙해 재미있게 읽고는 그녀가 16살에 쓴 소설이라는 것 때문에 엄청 샘나려 했다. 누구는 같은 나이에 이만한 소설을 쓰는데 난 뭘하고 있는건가... 동년배인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내가 감히 미국의 대통령을 보면서 샘내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면서도 내가 살아온 세월의 햇수가 챙피했는데, 하긴 살면서 그런 부끄러움을 느낀 게 어디 한두번 이던가.
그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이조 시대의 궁궐 내의 이야기의 근간이라는 게 결국 인간 구석 구석에 또아리 튼 아집과 이기심, 시기심, 권모술수를 바탕으로 그려지는거라 그게 너무 싫어 대체로 역사 소설을 안읽는데 그 소설은 정말 재미있었다. 손에 들자마자 한번에 다 읽었다. 읽고나서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반짝이는 두 눈에 재기와 장란끼가 가득한 젊은 남자애 모습이다.
스물 몇 살. 박사학위 과정이란다. 이 나이에 벌써 인간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야심, 신의, 충절과 배신을 속속들이 볼 줄 안다고? 정말 나 뭐하면서 사는 거야? 심란할 정도였다. 권력 앞에서 갈등하는 사람, 권력 앞에서 목숨 바쳐 충성 바치는 신하의 모습, 그리고 배반을 택한 이의 심정을 예리하게, 속도감 있게 그려놓은 걸 읽으면서 이런 통찰력을 가진 젊은 이들이 훗날 우리의 미래를 밝혀주리라는 희망에 뿌듯하기도 했다. 이십년도 더 전 이야기다.
이즈음 신문도 티브이도 보기 싫다. 벌써 몇 달째 온 사회가 그 이야기 뿐이다. 마음 속에 들끓는 수많은 생각이 나라고 왜 없겠는가. 하도 입맛이 써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을 뿐. 손자가 옆에서 묻는다. 왜 저 여자는 자꾸 자꾸 뉴스에 나와? 국민을 위해 쓰라고 주어진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썼단다. 자신의 의무가 뭔지, 권리가 뭔지를 모른거야. 게다가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건지 모르는 거란다. 애 데리고 지금 나 무슨 소릴 하는거지?
출석도 하지 않은 최씨 딸에게 학점을 준 교수, 숙제 대신 해 준 교수, 학칙을 바꿔가며 장학금과 온갖 혜텍을 준 교수들의 명단과 사진이 신문에 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내게 그리도 신선했던 그 젊은 작가가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란다. 하긴 아무리 명민하고 심지 굳은 이라도 힘 있는 이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놔야 하는 게 우리 나라 아니던가? 그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타협해야겠지... 그 기사를 본 후 며칠동안 내 속에 감춰진 숨은 욕망과 비굴함을 더듬어보며 쓸쓸했다.
얼마 전 아는 이가 노상강도를 당했다. 벌건 대낮에 젊은 이가 느닷없이 다가와 어깨에 두른 가방을 낚아채는 바람에 넘어져 얼굴에 찰과상과 함께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에이, 그냥 다 주지 그랬어. 그럴려고 했지. 근데 가방에 목에 걸려 나와야 말이지. 얼른 달라는 걸 주고 달아나고 싶었는데 나와주지 않는 가방... 그까짓 것 땜에 다친 게 아쉬워 자꾸 자꾸 나중엔 가방일랑 그냥 손에 들고 다녀야겠다고 뇌이시는 할머니... 총을 들이대고 내놓으라고 할 땐 그냥 주라고 한다. 목숨보다 더 중한건 없다고. 적의 가랑이 사이를 기게 되는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목숨은 우선 챙기는 거라고 우리보다 먼저 살아 본 어른들이 늘 말씀하셨다. 그런가하면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구차한 목숨을 그렇게 더럽게 챙겨서 뭐하냐고 서릿발같이 책하는 소리도 있다.
뭐가 옳은 걸까? 내가 그 교수였다면 자리를 내놓고 말지 그따위 다라운 권력따위에 굴할꺼냐고 탁탁 내던지고 말았을까, 아님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나 하나 협조 안한다고 달라질 것 없는데 그냥 슬금슬쩍 넘어가고 말았을까?
매일 이런 저런 기도를 수다스럽게 올리는 나는 종종 주님께 부탁을 드린다. 오늘 길에서 주인 없는 돈뭉치가 내 눈에 띄지 않게 하소서. 오늘 내 귀에 남의 소문이 들리지 않게 하소서. 께름직한 호의와 선물을 막아 주소서.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웃긴다. 아무 능력없는 내게 누가 무슨 선물을 한다고!
<
최 정(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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