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뜬 카더라 통신’이라는 칼럼을 한 달 전쯤 썼다. 미국 대선과정에서 쏟아진 ‘가짜 뉴스(fake news)’ 얘기다. 요즘 한국의 탄핵정국 상황이 꼭 닮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태극기 진영’과 반대하는 ‘촛불 세력’이 SNS에 서로 비방하는 가짜 뉴스를 남발하며 치고받고 있다. 정확한 정황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어느 쪽 뉴스가 맞는지 헷갈린다.
한발 앞서가는 미국에선 가짜 뉴스가 ‘대안 사실(alternative facts)’로 둔갑해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인파가 오바마 때보다 많았다며 백악관 대변인 숀 스파이서가 첫 정례 브리핑에서 가짜 뉴스를 흘려 문제되자 그의 상전인 켈리앤 콘웨이 대통령 보좌관이 TV 대담프로에 나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 사실”이라고 둘러댔다.
가짜 뉴스 덕을 톡톡히 입고 당선된 트럼프는 한술 더 떴다. 선거기간 여론조사 중 자신의 지지율을 부정적으로 집계한 언론사의 보도가 모두 가짜 뉴스였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당선이 이를 반증하는 대안 사실이라고 했다. 장녀 이방카 브랜드의 의류 판매를 중단한 노스트롬 백화점의 결정에도 정치적 흑선이 내재됐다고 했다. 역시 대안 사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미국의 원로 언론인들은 이 우스꽝스런 말을 우스개로 넘기지 않는다. CBS의 명 앵커였던 댄 래더와 뉴욕타임스의 전 편집인인 질 에이브럼슨은 대안 사실이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했을 뿐 본색은 가짜 뉴스라고 꼬집었다. 신통하게도 이들은 똑같이 대안 사실이라는 용어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뉴스피크(Newspeak)’에 비유했다.
뉴스피크(새 언어)는 영국을 통치하는 가상 국가 오세아니아의 독재정권이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기존 영어를 조합해 만든 엉터리 줄임말이다. 집권당인 ‘English Socialism’(영국사회당)을 ‘Ingsoc’으로 부르는 식이다. ‘동물농장’도 쓴 오웰의 ‘1984’는 전제정부의 공공연한 사기, 비밀감시, 역사기록의 조작 등을 고발한 대표적 ‘지옥향 소설’로 꼽힌다.
재미있는 건 대안 사실이 ‘뉴스피크’에 비유된 후 1949년에 발간된 ‘1984’가 거의 70년 만에 새삼스럽게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사실이다. 아마존닷컴은 지난 1월26일까지 ‘1984’의 판매부수가 무려 9,500%나 늘어났다며 재판발행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먹이는 대안 사실의 뜻이 뭔지 파악하려는 미국인들이 그 정도로 많다는 뜻이다.
며칠 전 ‘미국 대학들이여 일어나라’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이 눈길을 끌었다. 바드대학의 리온 보츠타인 총장은 이 글에서 대통령이 진실과 거짓을 분간 못하고 대안 사실의 존재를 주장하며 멕시코국경에 장벽을 쌓고 무슬림 교도의 입국을 금지하는 상황에서는 희망이 없다며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회복시키기 위해 대학총장들이 목소리를 내라고 촉구했다.
민주주의 바탕이 두텁고 시민의식이 고르게 계발된 미국은 가짜 뉴스와 대안 사실이 판쳐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헛소리를 바로잡는 원로 언론인이 있고, 책을 사서까지 사회상황을 공부하는 국민이 있고, 대학 총장들에게 일어나 나라를 바로 세우라고 촉구하는 선비가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이도, 저도 없이 온 국민이 두 편으로 갈려 죽기 살기로 싸운다.
고등학교 때 읽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나폴레옹에 패한 후 절망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철학자 요한 피히테가 외쳤다. “우리가 패한 건 군대가 없어서가 아니다. 국민이 이기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탓이다. 자녀들부터 도덕 재무장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리자”는 내용이었다. 70년 후 독일은 프랑스와 다시 싸워 대승을 거뒀다.
피히테의 명연설은 200여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에도 고스란히 통용될 듯하다. 국민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리사욕과 자기영달과 파당투쟁만 추구한다. 어차피 기성세대에는 희망이 없다. 모두 흙탕물이 몸에 배어있다. 한국도 초등학생들부터 인성교육과 도의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그래야 3세대가 지난 70년 후 최고국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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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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