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문제들이 삶의 여정 중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온다.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해도 삶은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많다. 과거에 경험한 어떤 삶은 큰 정서적 상처와 함께 마음 속 깊이 흉터로 남아있기도 한다. 그 흉터들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신과의사로 살다보니 어느덧 70대에 와있다. 그동안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얼른 대답이 안 나온다.
지금 세상은 솔직하지 않고, 착하지 않아야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출세를 위해서는 교과서와 성서에서 배우는 것은 모두 잊어버리는 게 좋다. 철학자들은 착한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환자는 40대 중반 여성이었다. 의사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미소도 잃지 않았다. 진료 약속시간을 잘 지키고 복용하라는 약물도 꼬박 꼬박 잘 챙겼다. 어디로 보나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단명이 주요 우울증이고 몇 번의 자살기도 경력까지 있다. 사람의 마음속은 밖에서 보이는 것과 안에 숨어있는 것이 아주 다른 경우가 흔하다.
착하다는 것은 남이 붙여주는 꼬리표다. 효부, 열녀. 효자, 모범생 등에게 이런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실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서로 모순된 두 종류의 성격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내면은 의존적이거나 열등감으로 채워져 있지만 외면은 이기심 강한 자애적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남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고, 남의 부탁에 노우를 할 수 없고, 남의 장단에 맞춰 사는 삶은 내면적 성격인 빈약한 자존감 때문이고, 항상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경향은 외면적 성격구조인 자애성 경향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대신 타인과 사회가 바라는 정체성으로 대치한다. 사회와 타인에게 자신의 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면 본인 자신도 행복해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고 평생 불안과 두려움, 스트레스에 쌓여 속으론 분통이 터지는 생활을 계속한다.
자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자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깔려있다. 착한 사람 중에 우울증과 화병 환자들이 많은 이유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놓치고 만다. 성숙하고 진짜로 착한 인격의 소유자는 논리적 사고와 판단을 주관하는 대뇌의 전두엽과 감정체계를 조절하는 변연계가 서로 소통하여 평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만 착한 사람들은 변연계의 감성체계가 너무 강해 전두엽과의 평형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호하거나 극복하려는 무의식적 행동 패턴이 착함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환자는 어려서 심한 열병을 앓았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했기에 주로 유모가 환자를 간호했다.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한다는 죄의식 때문인지 엄마는 퇴근 후 아이에게 무조건 잘해주었다. 항상 아이가 염려되어 매사를 간섭하는 헬리콥터 엄마가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사핑몰에도, 친구가족이 초청하는 슬럼버 파티에도 못 가게 했다. 하지만 환자는 부모의 말을 잘 들었다. 또한 자신이 병에서 살아남은 것은 남들에게 잘해주라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
환자는 가족과 남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극도로 삼갔다. 바람을 자주 피우는 남편도 번번이 용서해주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겉으로는 아주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열불이 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바로 아래 여동생은 정반대였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망나니였고 부모에 맞서 자기 의견을 당당히 펼치곤 했다. 후에 환자는 착하고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고, 여동생은 전문직업인으로서 남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환자의 의존적, 자애적 성격 형성은 영아기 때의 기본적 신뢰감이 잘 발달되지 못한데다, 10대 때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독립감의 결여 때문이다. 남을 위해 과잉봉사하고, 타인을 우선시하여 사회로 부터 칭찬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높여 보려는 심리적 상태가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듯싶다. 심리치료를 통해 이런 심리적 상태를 깨우쳐주는 게 치유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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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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