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의 부학장으로서 학생들의 학사 탄원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탄원서는 작게는 기한 넘긴 수강취소 신청부터 크게는 학사제적의 번복까지 다양하고 많다. 이미 정당한 절차와 규정을 통해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학생들이 마지막 보루로 내게 호소를 하는 것이다.
많이 받는 탄원서는 수강취소 신청이다. 취소 신청 기한을 넘겨서, 기말고사 치르고, 성적까지 다 나온 다음에 수강 취소를 허가해 달라는 탄원은 사실 ‘학점 잔머리’일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F학점 받은 과목들의 수강 취소를 신청할 경우다. 만약 학점 미달로 제적당한 학생이라면 그렇게 해서 조금씩 평점을 올린 후에 제적을 번복해 달라고 신청할 수 있다.
물론 학생들은 탄원 연유서에 ‘학점 잔머리’라고 쓰지는 않는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제에 신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부모의 급작스러운 사망이 많다. 이럴 때 나는 대개 ‘불가’ 결정을 내린다. 조부모님 잃은 슬픔으로 수강취소 신청 기간도 놓치고 기말고사도 완전히 망쳤다면 A 학점 받은 다른 과목들도 같이 취소해 달라고 해야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결정을 따르지 않고 총장이나 프로보스트에게 다시 탄원서를 보내는 학생들이 간혹 있다. 내 결정을 번복시켜 달라는 거다. 그래 봤자 총장이나 프로보스트는 ‘알아서 처리하라’고 다시 내게 돌려보낸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학생들이 왜 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까? 그것도 내게 직접 제기하지 않고 왜 곧바로 총장실, 프로보스트실로 갈까?
접수계에 물었다. “학생들이 이미 결정된 사안을 윗선으로 다시 올리는 경우가 이전에도 많았나요?”
접수계 직원이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아뇨, 학장님 오신 다음부터 조금 더 많아진 듯해요.” 그러더니 직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떨린다. “학장님의 인종과 성별 때문에 학생들이 더 쉽게 윗선에 탄원을 넣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요! 너무 화나요!!”
그렇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항상 백인 남자가 앉아있었다. 소수민족 여자로는 내가 처음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내 윗선인 백인 남자 총장의 권위에 호소해서 내 결정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게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언젠가 직원들이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를 만나게 해 주세요(I want to meet with him).” 나를 만나겠다는 학생들에게, “그녀야(It‘s her).” 라고 고쳐주면 학생들의 얼굴 표정이 확 달라지는 게 재미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모두 같이 웃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다음날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행진을 통해 결집된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나 역시 교육적 차원에서 초등학생 딸과 함께 행진에 참가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SNS는 트럼프 시대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는 포스팅으로 뒤덮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계속 화를 내고 슬퍼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일지 모르겠다. 숭고한 순수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화를 내거나 슬퍼할 여유가 많지 않다. 당장 나 같은 사람들의 권위를, 나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는 세력이 커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정을 의심하고 내 윗선에 탄원서를 다시 올리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더욱 많아질지도 모른다.
내가 이 자리에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행히 내게는 평생 교수직이라는 무기가 있다. 보직에서 잘려봤자 계속 교수다. 그냥 하던 대로 계속 가려고 한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다.
<
이상희 UC 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