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서부 끝 시애틀에서 이곳 동부 끝 워싱턴으로 조카딸이 방문왔다. 트럼프 대통령 선서식 다음 날(21일) 열린 ‘여성행진(Women’s March)’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그 곳에서도 할 수 있지만, 더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곳 워싱턴에 와 집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란다.
이번 시위는 단지 트럼프를 성토하기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여성 인권 문제와 의료복지 이슈까지 포함한 대규모 집회였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에 미국은 남녀평등이 가장 잘 보장된 최고의 법치국가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은 아직도 남녀평등이 헌법상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여성 투표권이 인정된 것은 1920년이며, 그 이후 1923년에 여성 평등권 수정안이 제안되었다. 이는 “성별로 인해 연방정부나 주정부로 부터 평등권을 뺏기거나 거부될 수 없다”는 ‘평등권 수정안(ERA-Equal Rights Amendment)’이다. 그러나 여성 평등권 수정안은 별 진전이 없었다.
그로부터 약 50년 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의 월급의 반 밖에 못 받고 차별 대우 받는 것에 항거하여 1970년대 여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여성 평등권 수정안 통과를 위해 미 전역에서 데모를 한 결과, 연방 상하원은 평등권 수정안을 1972년 3월에 통과시켰다.
비록 평등권 수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했지만, 미국 50개주 중에서 38개 주의 비준을 받아야 비로소 미국 헌법 수정안으로 채택될 수가 있다.
50개 주에서 비준을 받기 위한 여성운동이 퍼지고 있을 무렵, 낙태가 불법이었기에 수많은 여성들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혼자 낙태를 하다 아이는 물론 자신까지 죽는 일들까지 생기게 되어 사회문제로 번져 나갔다. 1973년 연방 대법원은 그 유명한 로우 대 웨이드 케이스를 통해 마지막 단계에서의 낙태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던 중 35개 주가 여성 평등권 수정안을 비준했으나, 1977년 일리노이가 비준을 하지 못해서 연쇄적으로 그 다음 주도 하지 않게 되어 결국 평등권 수정안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 버리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헌법상 남녀평등의 보장을 포기한 나라가 된 셈이다.
이번 ‘여성행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197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여성운동의 부활을 뜻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숱한 여성 비하 발언과 성추행을 통해 여자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믿지 못하는 ‘여성 증오자’로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혔다. 미국과 전 세계 여성들이 화가 난 것은 트럼프가 여성을 차별적으로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진에 참여한 여성들은 핑크색 털모자를 쓰고 참여하기로 하였는데, 그 이유는 트럼프가 여성을 표현한 ‘푸시(Pussy)’라는 단어가 ‘새끼 고양이’를 뜻하는 한편 여성의 성기를 폄하하는 비속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성행진’에서 여성들이 메시지를 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의 의료 보호이다. 트럼프는 낙태를 이유로 저소득층 여성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사회단체에 지원금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단체는 저소득층 여성에게 피임약을 제공하고 유방암 검진 등 여성에게 꼭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여성의 인권이 1973년 이전의 시대로 뒷걸음질하여 여성의 생존과 미래가 또 다시 불확실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성들이 하나 되어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선서식에 힐러리가 흰옷을 입고 나타났다. 흰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1920년대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고자 할 때 여성들은 순결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었다. 그 때의 전통에 따라 1970년대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 또한 흰색의옷을 입었다. 힐러리가 바로 여성운동의 상징인 흰색 옷을 입고 무언의 시위를 한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가 과연 위대한 나라인지 묻고 싶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여성 운동이 되살아나 미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것이다.
이번 ‘여성행진’은 분명 최초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재촉하는 서곡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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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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