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신선한 노동력을 숭배하는냐, 아니면 자본력(富)을 숭배하느냐.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로서, 사실 공산주의의 출발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이상 실현을 위해 인류가 겪어야 할 (체제 개선향한)고통이었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논하고 불평과 불만은 있기 마련이었다. 요사이 한국사회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 또한 그 언저리엔 소외된 계층의 욕구불만, 권력층에 대한 증오가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민중과 대충돌을 이르켰던 시기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러시아의 최순실) 라스푸틴이 등장했던 때와 맞물려 있었다. 민중을 위한 민중의 궐기… 러시아는 혁명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이후 붉은 피를 강처럼 흘리게 되지만 그 새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세가 기울던 시기, 러시아는 라스푸틴이 개입한 독일과의 남부전선 전투에서 패배, 전선이 붕괴되어 국가마저 존망이 위태로운 위기에 처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2월 혁명을 일으켰고 이후 등장한 세력이 바로 레닌이었다.
레닌은 니콜라이 2세를 보호하던 임시정부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10월 혁명을 완성, 결국 그 유명한 볼셰비키 혁명의 수장으로 떠올랐다. 인류가 사회 속에서 메시아를 추구해 온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가 늘 제도와 충돌해 왔기 때문이었다.
서구는 소련의 공산혁명을 실패로 규정하지만 혁명이야말로 인류의 응얼진 분노의 썪은 고름을 시원하게 도려낼 수 있는 가장 간결한 수술 처방이기도 했다.
혁명… 그것은 종교 만큼이나 신선하고 강렬하게 민중들을 흥분시켰는데 1917년, 당시 10대였던 쇼스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기차역에 나타난 레닌의 연설을 직접들었고, 그것은 그에게 평생의 감동으로 남았다고 한다.
이후 빨갱이(음악가)로 성장한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공산당 체제를 찬양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게 되는데, 그중 압권이 바로 7번 ‘레닌그라드’, 12번 ‘1917년(볼셰비키)’, 5번 ‘혁명’ 등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이 주는 색다른 감흥은 그 주제가 늘 자본주의의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공산주의 혁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과 자유를 노래해야 할 음악가로 태어나, 혁명이라는 비극의 수레바퀴 속에서 외롭게 투쟁을 노래해야했던 그의 음악은 암울하면서도 비극적이었지만, 또 투쟁의 노래들이 그러하듯… 얼의 톱니바퀴가 부딪혀 산산히 조각나는… 불꽃튀는 전율 안기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그의 5번 교향곡 (혁명)을 알아주지만 정작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작품은 바로 7번 ‘레닌그라드’ 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1시간 20분짜리 대곡으로서 그의 작품 중에서도 장편에 속하는 것인데 거대한 악기 편성은 스케일과 작품의 빼어남에도 불구, 잘 연주되기 힘든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구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부 발트해의 끝부분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을 끼고 원래 스웨덴 영의 핀란드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17세기말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스웨덴에게서 새로 얻은 이 교통의 중심지를 수도가 될 지역으로 선정,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 이름지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본따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묘지와 도스또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무대가 되기도 한 곳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했는데 쇼스타코비치 역시 도시 안에 숨어 처참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고한다. 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겨울동안 시민들을 아사시켜 무혈입성하겠다는 작전을 기도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의 3백만시민들은 무려 900일 동안 굶주림을 참아가며 처절히 저항한 끝에 마침내 독일군의 포로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굶주림과 포격으로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간신히 탈출한 피난민들을 빼면 겨우 65만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의 도시’ 칭호를 수여했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은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에게 바치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 명명되었다.
‘레닌그라드’ 는 이후 혁명의 참뜻과는 다르게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고 스탈린같은 독재자를 길러낸 온상으로서, 1991년 공산당이 붕괴될 때까지 악명을 떨쳤는데, 혁명의 열기는 역사 속에 사라졌지만 교향곡 7번만큼은 혁명이 남긴 역사의 꽃으로, 지금껏 불후의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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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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