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아모레퍼시픽 그룹 서경배 회장이 자신의 이름을 딴 공익재단을 만들기 위해 개인 재산 3,000억원을 출연하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자기회사 제품과는 전혀 관련 없는, 기초과학 연구지원을 위해 거액을 쾌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기부규모를 1조원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그렇게 된다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새로운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재벌들의 거액 출연은 대부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회적 용서를 구하는 의미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부액수도 액수지만 더 눈길을 끈 것은 서 회장이 한 말이었다. 그는 “성공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어렵다. 제가 20여 년 동안 보유하고 있던 주식이 현재의 가치를 갖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개인 재산을 내놓은 것이라는 얘기다.
성공은 온전히 그 당사자의 개인적 노력과 실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큰 성공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개인의 타고난 실력과 노력의 결과로 성취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이른바 ‘실력주의’다. 특히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이런 믿음이 강하다. 기업인들의 자서전을 들여다보면 쉽게 확인된다. 이들은 대개 정부의 간섭과 높은 세금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내가 잘나서 이룬 성취인데 왜 남이 간섭하고 가져가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이 전적으로 실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성공에는 개인의 노력과는 별개로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한다. 어떤 분야가 됐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운칠기삼’ 심지어 ‘운칠복삼’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조금 지나친 표현일진 몰라도 개인의 실력과 노력이 항상 성공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운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서경배 회장이 언급한 ‘타인들의 도움’이다. 아무리 잘났어도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모든 성취를 이룰 수는 없다.
서 회장의 경우를 보자. 그의 기업이 지금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한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한류열풍은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의 한국산 화장품에 대한 관심과 폭발적인 매출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그의 소유주식 가치도 폭등해 한국의 대표적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한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연예인들과 기획사들이 노력하고 땀을 흘린 결과물이다. 그러니 서 회장의 언급은 겸손하면서도 아주 정확한 진단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는 최근 가디언지 칼럼니스트인 오언 존스와 나눈 대담에서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돈을 벌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며 “그런 일이 16세기 자급농 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현대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법제도, 정부투자, 인프라, 교육 등 사회 모든 영역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며 “만약 누군가 세금을 자기 재산에 대한 도둑질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공공의 것을 자기 것처럼 훔치려 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는 부자들은 이런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자들이 증세와 기부에 적극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올 초 뉴욕의 부자 40여명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 부자 증세를 요구하고 나선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들은 공개편지를 통해 “상위 1% 부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 공립학교 확충과 도로보수 등 공공영역 개선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자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무가 뒤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 혼자 잘나서 거두는 성공이란 없다. 이를 깨닫는 부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동체적 정서에 바탕을 둔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비단 정서적 건강 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육체적 건강까지 그렇다는 건 이미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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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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