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80 가까이 들고보니 옛날엔 보이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또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젊었을때엔 그 많던 욕심과 남을 비교하던 샘이나 질투때문에 자신이 가졌던 장점이나 귀한 것들이 별로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와 보니 의외로 내가 가진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에 대한 가치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게 세상말로 철이들었다는 것일게다. 옛날엔 남편의 직장이나 수입이나 자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두각을 나타내나, 또 내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모나 학벌이나 어느 동네에서 얼마나 큰집에 살고 있나 등등을 비교하며 거기에 비추어 사람들을 평가하고 행복의 기준을 두고 살았던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며 가치가 없나를 새삼 깨달으니 나이가 든다는 것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혜가 생기는 것이기에 늙는다는 것이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나 이웃들을 만나면 자연히 자식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는데 이곳 라스모어에 사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식들을 다 잘키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 자식들을 얘기하자면 딸은 변호사이고, 막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고 둘째 아들은 사업을 하니까 사장님이고 큰애는 전화국에 다니는 테크니션이다.
크게 출세한 놈도 없고 그렇다고 못사는 놈도 없다. 그저 평범한 직업들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다 집들 하나씩 지니고 자식들을 잘 키우며 그야말로 평범한 일생을 살고있다. 그런데 이렇게들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나는 정말 고맙고 기특하다. 내게 돈 달라고 손 내미는 놈 없고 아프다고 병원에 누워있는 놈 없고 나쁜짓 해서 유치장에 갇쳐있는 놈만 없으면 내 인생은 즐거워!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십년만 있으면 하버드 나온 놈이나 버클리 나온 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조금 더 성공하고 조금 더 큰집을 지니고 조금 더 나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만 빼면 미국에서 먹는 것들은 거의가 평등하다. 조금 비싼 고기를 먹는 놈이나 조금 질이 떨어진 고기를 먹는 것만 빼면 한국인들이 먹는 밥이나 김치는 다 똑같다.
의사들은 또 이렇게들 말한다. 잘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행복이다라고.
내가 건강할 때는 이 기본적인 행복을 잘모른다. 지금 내 주변에는 이런 것들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있다. 걷는 것도 워커에 의지해야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쯤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없게 된다. 나의 가장 치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프라이버시한 곳을 남의 손을 빌려 도움을 받게 되고, 밥도 내 손으로 먹지 못하게 될 때쯤에는 산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요 고통이며 저주다.
얼마전 한때는 이웃으로 살았던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남편이 이젠 치매가 아주 심해져서 이곳 미국의 시설을 알아보니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나 한국을 가서 사정을 알아보니 다시 한국의 국적을 회복하면 자신이 육백불 정도만 내면 나머지는 한국정부가 다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나도 귀가 쫑긋해졌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만약 어느날 요양원 신세를 져야한다면 하루 한끼는 한국 밥을 먹어야 사는 맛이 나는 나같은 사람들은 모두 보따리를 싸들고 귀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두어주쯤에 이웃에 살던 105세 된 노인과 100세인 그의 아내인 베티가 24시간 도움을 받는 곳으로 일인당 매월 만불씩 내야 하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달에 일인당 만불을 내야한다는 말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식으로 돈을 내야된다면 일년이면 둘이 24만불이 든다. 이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이 미국에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장시간 아프면 자신들이 벌어 놓은 돈을 다쓰고 죽는다는 말이 맞는구나 했다.
우리 말에도 만석지기는 만가지 걱정이 있어서 잠을 잘 못자도 노동자는 단잠을 잘 수 있다라는 말이있다. 내가 요즈음 매일 같이 하는 기도 중에는 죽을 때까지 자긍심을 가지고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품위를 지니고 죽고 싶다는 것이다. 평범하게 살다가 조용하고 평범하게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소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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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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