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한국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같은 날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는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를 열었다. 이 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반정부 시위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시위 참가자들도 학생에서 회사원 등 소위 ‘넥타이 부대’로 확산됐다.
이 때 노태우가 들고 나온 것이 ‘6.29 선언’이다.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등 정치인의 사면 복권 등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대통령 후보 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전두환은 이를 받아들였고 한국은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후 진행된 상황은 민주화 세력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차기 대통령은 나’라는 확신에 빠진 김대중과 김영삼은 누구도 후보직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12월 16일 실시된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됐다. 세 후보 투표율은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였다. 후보 단일화만 이뤄졌더라면 민주화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는데 두 후보의 과욕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지난 주 한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면서 한국 정가는 조기 대선 국면으로 급속히 선회하고 있다. 일부 국민들은 ‘촛불의 승리’라며 기뻐하고 있지만 과연 내년 대선 정국이 국민들이 원하는대로 진행될 지는 미지수다.
야권은 1987년 때처럼 대선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누가 나와도 치명적 타격을 입은 여당 후보를 상대로 손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야권이 단일 후보를 냈을 때 이야기다. 야권 승리 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단일화는 어려워진다. 후보만 되면 청와대 입성이 보장되는데 누가 쉽게 이를 포기하려 하겠는가.
현재 대선 가도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이 자리를 내놓을 리도 만무하고 본인이 설사 원한다 하더라도 그를 밀고 있는 친노 세력이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에 입문한 후 철수에 철수를 거듭하는 ‘철수 정치’를 하다 지난 총선 때 겨우 민주당을 뛰어나와 독자 세력을 구축한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2012년 대선에 이어 다음 대선에서마저 양보를 한다면 안철수는 사실상 정치 인생을 접어야 한다. 둘이 다 출마하고 여권이 단일 후보를 낸다면 “용광로 하나가 3김을 녹인” 1987년 때와 마찬가지로 야권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게 된다.
그 때와 다른 점 하나는 여권도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신군부를 위시한 보수 세력이 노태우를 중심으로 뭉쳤던 그 때와는 달리 여권은 지금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친박 비박 싸움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당시 야권 후보였던 김대중 김영삼에 비해 현 야권 지도자들은 너무도 허약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점이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는 수십년간 독재 정권과 싸운 투쟁 경력에 나름대로 정치적 비전과 열성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문재인은 노무현 비서실장이라는 경력 달랑 하나고 민주화를 위해 뭘 했는지 잘 알 수도 없다. 지난 번 총선 때 광주에 가 “호남이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더니 호남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하자 “호남이 자기를 버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북한 제재에 관련해 북한의 반응을 미리 물어봤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우기고 있다. 이런 문재인과 지난 총선 때를 제외하고는 철수 이외에 해 본적이 없는 안철수가 격랑 속의 한국을 잘 이끌고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시민 혁명으로 리비아의 가다피와 이집트의 무바라크 등 독재자는 물러났지만 리비아는 지금 무정부 상태고 이집트는 군부 독재로 회귀했다. 아직도 내전 중인 시리아는 그 동안 수백만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패한 정권을 축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한국에서 정치한다고 나대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내년 한국이 과연 제대로 굴러갈 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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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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