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40년 전 미국에 연수 왔을 때 틈만 나면 여행했다. 주머니가 가벼워 주로 허름한 모텔에 묵었는데, 희한하게도 옷장이나 스탠드 서랍에 꼭 성경책이 들어있었다.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내겐 미국 모텔주인들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 같았다. 오래 후에야 그 성경책이 모텔주인 아닌 국제 기드온협회(GI)라는 기독교단체의 공짜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GI는 1899년 위스콘신 주 보스코벨에서 우연히 같은 호텔방에 투숙한 떠돌이 크리스천 상인 3명이 의기투합해 창설했다. 지금까지 성경책 21억 3,722만 1,536권을 지구촌의 호텔, 모텔, 병원, 학교, 군부대, 교도소 등에 무료로 기증했다. 전 세계 200개국의 지회가 101개 언어로 된 성경책을 뿌리고 있다. 한국 GI도 지금까지 총 5,576만 2,506권을 배포했다.
기드온은 성경의 사사기에 나오는 BC 1170년대의 이스라엘 판관 겸 장수이다. 겁쟁이 시골농부였던 그는 이스라엘을 침공한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라는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300명의 용사를 뽑아 한밤중에 기습했다. 이들이 여호와의 작전대로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밝히고 나팔을 불어대자 혼비백산한 적군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13만5,000명이 전멸했다.
GI가 기드온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겸손과 믿음과 복종의 롤 모델이며 자신의 계획이나 지략과 관계없이 여호와가 자기에게 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실행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인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GI의 행동강령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실천할 태세를 갖추도록 주문한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나는 요즘도 장거리 여행을 비교적 자주 한다. 숙소도 격상돼서 호텔급 모텔에 묵는다. 객실이 넓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커피와 커피포트는 물론 전자레인지, 미니 냉장고, 헤어드라이어에 다리미까지 갖춰져 있다.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공짜로 먹는다. 그런데 예전에 있던 게 없어졌다. 방 안 어디에서도 성경을 십중팔구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실태조사 결과 객실에 성경을 비치한 호텔의 비율이 지난 2006년 95%에서 올해 48%로 10년 만에 반토막 났다고 LA 타임스가 보도했다. 밀레니얼 세대 등 종교에 관심 없는 젊은 여행객들과 회교도, 불교신자 등 국제 여행객들의 눈치 때문이다. 서랍장 대신 선반을 선호하는 요즘의 호텔방 설계 추세도 성경책이 안주할 자리를 빼앗는 요인이라고 했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무신론자 단체인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FFRF)이 객실에서 성경을 치우도록 15개 주요 호텔체인에 압력을 가했다. 미국인 4명 중 1명이 비종교인이고, 투숙객 비율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 책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당신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질 수 있다”는 협박 스티커를 만들어 호텔을 돌며 눈에 띄는 성경마다 붙여 놨다.
GI는 소송도 많이 당했다. 특히 공립학교 학부모들이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툭하면 GI를 제소했고, 유대교와 천주교 및 진보사회단체들이 이들을 밀어줬다. 1951년 뉴저지주의 러더포드 교육구 케이스가 가장 떠들썩했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1953년 주 대법원이 GI에 패소판결을 내렸고, 이듬해 상소를 받은 연방대법원은 심리자체를 기각했다.
전 세계 GI 회원은 27만여명(한국에만 3,200여명)을 헤아린다. 모두 신앙심 깊은 현역 또는 은퇴 사업가들이다. 연간 예산이 1억달러다. 대부분 회비와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요즘도 매년 8,000만권의 성경을 지구촌에 배포한다. 그러나 작금 세태는 3,200여년 전 기드온 때와 판이하다. 정교분리와 무신론 말고도 GI가 싸워야할 대상은 미디안부족 군대보다 많다.
호텔 갑부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당선자의 카지노 리조트 객실에도 성경이 비치돼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는 ‘강력한 기독교신자’를 자처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바이블 벨트’의 보수표를 휩쓸었다. 성탄절 전통 인사말인 ‘메리 크리스마스’를 부활시키겠다고 장담했다. 전 세계 트럼프호텔의 모든 객실에 성경을 비치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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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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