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클래식 음악단체다. 세계 최고 무대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에서는 매년 200여회의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 LA 오페라가 기껏해야 40여회 공연하는 것과 견주어보면 그 규모와 위상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트에서 지금 역사적인(!) 공연이 열리고 있다. 12월1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되는 사리아호의 오페라 ‘먼 곳으로부터의 사랑’(L‘amour de loin)이 그것이다.
왜 역사적이냐고?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Kaija Saariaho)가 여성이고, 지휘자 수산나 말키(Susanna Malkki) 역시 여자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자가 작곡을 하고 여자가 지휘를 하는 것이 무슨 대수이며 왜 역사적인 일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33년 역사의 ‘더 메트’에서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 100여년 만에 처음이라는 사실을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1903년에 딱 한번 에델 스미스의 ‘숲’(‘Der Wald’ by Ethel Smyth)이란 오페라를 공연한 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또 지휘자 수산나 말키는 메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네번째 여성이다. 1976년 새라 콜드웰이 최초였고, 1996년 시몬 영, 2013년 제인 글로버가 했었다. 그동안 메트 오케스트라의 포디엄에 오른 남자 지휘자는 수백명도 넘을텐데 여자는 고작 네명, 그리고 그 사실이 뉴스에 회자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 작곡가와 지휘자는 희귀한 존재다. 그것은 정계, 재계, 학계, 다른 장르의 예술계를 포함한 어떤 분야의 여성 진출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적다.
여자가 작곡이나 지휘를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오랫동안 여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겨왔을 뿐이다. 여자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었다. 즉 몸을 써서 음악을 하는 것은 ‘봐줬는데’ 머리를 써서 작곡을 하고, 단원들을 지휘하는 일은 금기시되어온 것이다.
요즘 오케스트라 단원 가운데 여자의 비율은 30~40%나 되지만,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 중에서 여자 지휘자는 2007년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마린 알솝(Marin Alsop)이 최초이고 유일하다.
그러나 완고한 사회적 통념 속에서도 여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작곡을 했다. 어쩌면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 시인 사포가 기록에 남은 최초의 작곡가일지도 모르겠다. 시가 곧 노래이고 음악이었던 시대에 그녀는 생생하고 고결하게 사랑의 기쁨과 아픔, 질투를 노래했다.
이후 고대와 중세를 지나며 1,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는 여자가 작곡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악보가 없던 시절이었고,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이후 기록과 악보가 남아있는 여성 작곡가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중세 때 카시아(Kassia, 810~867)와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of Bingen, 1098–1179)이 있었다. 수녀이며 학자이고 예언가, 예술가였던 힐데가르트는 신을 찬미하는 음악과 음악극을 120편이나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를 뛰어넘어 17~18세기 바로크와 고전시대에는 바바라 스트로찌, 엘리자베스 들라 게르, 마리아나 마르티네스 등이 있다. 이들은 성악곡과 오페라, 하프시코드 음악을 작곡했다.
19세기 낭만시대로 넘어가면 우리가 아는 이름들이 나온다. 멘델스존의 누이인 파니 헨젤, 로버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 루이즈 파랑, 요제핀 랑(Josephine Lang), 세실 샤미나드 등이다. 2010년 영화 ‘모차르트의 누이’(Mozart’s Sister)는 모차르트의 누나도 작곡을 했으나 천재의 그늘에 가려 꽃을 피우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을 가미하여 그리고 있다.
현대에는 많은 여성 작곡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진은숙도 그중 하나고, 지금 실력있는 젊은 작곡가들 중에는 여자들이 상당수 포함돼있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이 남자 작곡가의 음악과 동등하게 연주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지휘의 역사는 작곡보다 훨씬 짧지만(약 200여년) 최근 들어 알솝과 말키를 필두로 미르가 그라치니테 틸라, 바바라 해니건 등 대단한 지휘자들이 중요한 포지션에 초청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
그건 그렇고, 오페라 ‘먼 곳으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LA에서는 언제 볼 수 있을까.
<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