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힘들었던 며칠간의 노고를 되새기며, 사색에 잠겨 걷던 퇴근길. 한 노인이 길가에 걸터앉아 종이컵을 내밀고 있는걸 보았다. 잠시 후 내 지갑 속 동전들을 그에게 탈탈 털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친 그에게 돌아가기에는 발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그에게 돌린 등으로, 길바닥에 이불을 펴고 잠을 청하며 거리를 배회하는 다른 이들을 지나쳐 집에 당도했다. 분명 지붕이 있고, 수도와 전기가 나오는 집에서 등이 따뜻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 나는 전 세계 인구의 75%보다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짊어지고 가는 삶에 대한 걱정의 무게 역시 그만큼 가벼울까?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진감래를 기대하며 변호사가 되기 위해 나름 수년간의 노고를 투자했던 나의 인생은 아직도 육법 시험만큼이나 어려운 순간이 많아 첩첩산중처럼 느껴진다. 하루10시간 이상의 공부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루 10시간 이상의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학업 중의 시험은 틀리면 그만이었지만, 현실속의 문제는 틀리면 삶에 직격탄이 따랐다. 나는 매 순간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수입을 웃도는 지출을 염려하는 기계처럼 살아간다. 일거리를 위해 대도시에 정착 아닌 정착을 했지만, 주거비를 감당하자니 노후대책이나 저금이라는 개념은 내게서 멀어진지 오래다.
분명 나쁘지 않은 시급을 받고는 있지만 수입의 절반에 육박하는 세금을 내고 있고, 파산신청을 해도 감면되지 않을 억대의 학자금 융자를 갚아야 하는 처지로, 내게도 평균 이상의 돈에 관한 강박감이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연봉이 2만달러이거나 20만달러이거나 모두 중산층에 해당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1%의 상류층이 국가의 부 거의 전부를 거머쥐고 있으니 국민의 99%가 하류층인 것 아니냐는 묘하게 공감되는 댓글이 있었다.
다들 잘 먹고 잘 살고자 자본주의의 본고장으로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모여들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학력이나 기술력을 쌓아 돈벌이가 되는 일에 끌려 다니는 이 경제체제의 폐해에 왠지 익숙하다. 물론 자본주의에서의 물질적인 성공은 어느 선 까지는 투자의 양이나 질과 비례한다.
하지만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경제적인 자유와 시간적인 자유는 반비례한다. 30세에 스스로 집을 마련한 친구는 고교졸업 직후 취업하여 부업에, 아르바이트까지 겸업을 했다. 학업에 몰두했던 전문직 동기들은 대부분 고액의 연봉을 받지만, 많게는 하루 19시간에서 주 120시간 이상의 방대한 업무량을 감당해내야 한다.
‘부’는 긁어모아지는 축적물이지 무에서 유로 창출되는 창작품이 아니다. 순수한 자기 이익을 위한 노력은 보상받아 마땅하지만, 누군가의 지나친 과욕은 결국 상대적 빈곤현상을 고착시킨다. 얼마 전 한 직장 동료가 벌어도 끝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예측불허의 앞날과 세금보고 시 부과될 벌금 모면을 위해 급하게 가입한 건강보험이, 정작 필요한 순간이 되니 까다로운 제약과 형편없는 혜택들로 무용지물처럼 느껴졌단다. 뒤늦게 해지하려하니 위약금을 물어야 했는데, 깨알 같은 활자의 보험 계약서에는 변호사인 그로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조항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 뿐일까? 월세, 자동차 리스, 면허료, 전화선 개통, 은행에 계좌를 트는 것을 비롯, 대부분의 생활 유지비용이 고객의 편리와 만족보다는 기업의 이윤을 위주로 복잡하게 만들어진 계약서들로 시작되어, 서명과 동시에 족쇄로 채워진다. 지출이 해일처럼 불어나는 현대인의 삶은 ‘부’라는 큰 파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빈곤한 삶을 연상시킨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 절대적인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 과연 행복과 사회발전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천문학적인 부를 가진 대통령 당선자는 절세를 했다는데,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고스란히 내는 나는 덜 부지런 하고 덜 현명하여 중산층의 삶을 한탄하는 신세가 된 것일까?사실 대기업에 돈을 벌게 해주는 노동의 대가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 나 역시도, 집 없는 이들을 외면하고 내 아픈 발만 챙기기에 급급하며 “나만 잘 먹고 나만 잘살자”주의를 지향하는 또 하나의 위선적인 돈의 노예 아닐까. 솔선수범을 통해 내가 먼저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과 자세로 살면서 어떻게 나의 삶만 나아지길 바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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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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