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해부학은 내가 20여 년 학교를 다니면서 들었던 수업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과목이다. 그때 해부했던 사체는 내 기억 속에서 ‘인간 대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머리뼈를 자르자 드러난 두뇌부터 엄지발가락 발톱 아래에 있는 얇은 신경까지, 겉피부에서부터 가장 깊고 은밀한 장기의 내벽까지, 뼈가 앙상히 드러날 때까지 한 겹 한 겹 벗겨 내면서 꼼꼼히 공부했다.
해부학 교실 실습탁자 위에 놓이는 사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깔끔한 화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질퍽한 사체 해부를 하게 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저 성적을 잘 받아서 재수강하는 참사를 면할 궁리만 했다.
내가 매일 들여다본 사체는 오른쪽 무릎부터 절단되어 없어진 노년의 남자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인간 신체를 대표하는 무작위 표본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다른 실습조들이 해부하는 사체들을 굳이 찾아다니면서 비교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사람 생김새야 다르지만 속은 다 똑같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무작위 표본이 아니었다.
해부학 실습을 끝내고 몇 년 뒤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해 찾아간 곳은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의 자연사박물관이었다. 박물관에는 수천 구의 인골들이 연구자들을 위해 소장되어 있다. 수백 구의 고릴라와 침팬지도 있다. 사체 한 구가 인간을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수천 구의 인골들은 현대인의 형질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고릴라 수백 구를 들여다보면 고릴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된 수천 구의 인골들은 인근의 케이스 웨스턴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 소장품이었다. 20세기 초 오하이오는 행려병자나 보호자 없는 사체를 모두 케이스 웨스턴대 의과대학으로 보내도록 했다. 당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체들은 모두 이 대학 해부학 교실로 보내졌고 해부학 실습이 끝난 후에는 인골만 남겨 해부학 교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0년 이후 클리블랜드 자연사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수천 구의 인골이라면 적어도 1920년대 당시의 인구를 살펴볼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막상 자료를 수집해 보니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백인’으로 기록된 인골들의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다. 반면 ‘흑인’으로 기록된 인골들의 건강 상태는 우수했다. 그 점만 본다면 1920년대에는 ‘흑인’들이 ‘백인’들 보다 더 건강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략의 흐름이 파악되었다. ‘백인’들은 행려병자인 경우가 많았다. 나이도 많은 편이었다. 반면 ‘흑인’들은 젊었으며 폭력이 사인인 경우가 많았다.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경우가 많았던 것일까?매우 창피한 고백이지만 당시에는 논문을 써서 졸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이 문제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급격히 늘어난 의과대학들이 앞 다투어 해부학 교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해부학 교실에서 해부된 사체들은 흑인들과 빈민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체를 기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본인이나 가족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묘지에서 사체가 강탈된 경우도 많았다.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 활동이지만 과학자 역시 인간이니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나 보다.
인간, 호모 사피엔스를 중립적으로 대표하는 자료로 생각하던 인골 표본이 사실은 특정 집단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듯 만약 클리블랜드 자연사 박물관을 찾아가서 20년 전 박사논문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계측을 하던 나와 만나게 된다면 얘기해 주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삶을 음미하고 공감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이다. 인골은 그냥 인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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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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