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스위스 주재 근무 첫해에 한국대사관 주최 8.15 경축기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스위스 정부 고위관리를 비롯해 많은 나라의 외교관들이 초대됐다. 행사장에 스위스 대통령도 참석한 줄은 몰랐다.
나와 내 가족의 스위스 정착에 많은 호의와 도움을 준 S 대사는 “대통령께 인사나 한번 하지” 하더니 어울려 담소를 나누고 있는 대통령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는 여느 참석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너무 평범해 그가 정말 대통령인가 싶었다.
수행원을 대동하고 경호원 등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어야 제격일 것 같은 대통령의 주변은 오히려 한산하였다. 미국이나 한국의 대통령 행차 때 볼 수 있는 권위나 위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어색해 보였다.
대사는 “최근에 부임한 한국 기업의 스위스 책임자”라며 나를 소개하였고, 대통령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긴장도 된 채였는데, 대통령은 내 가족이 스위스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사는 동네는 어디며, 자녀는 어느 학교로 정했느냐는 등 자상하게 물었다. 당시 이웃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리는 IOC 총회의 88 서울 올림픽 유치 전망과 한국과 스위스 간 여행객 숫자에도 관심을 보였다.
대통령의 다정다감한 질문에 긴장이 눈 녹듯이 풀렸고 더는 어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에 매료되어 호기심마저 발동하였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하는, 참으로 걸맞지 않은 엉뚱한 질문까지 하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달라진 게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고 물었으니 말이다. 그는 “분데스하우스(연방정부청사) 지하에 전용 주차장이 별도로 마련된 것 이외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최고 위원 시절에는 ‘선착순’(First Come, First Serve) 원칙으로 주차했는데, 이제는 빈자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수고는 덜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어린애 같은 질문은 또 한 번 이어졌다. “오늘 대통령을 경호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대통령도 국민과 같이 일반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다”며, 잔잔한 미소와 함께 리셉션장 밖에 한가롭게 서 있는 경찰을 가리켰다. “대통령도 그저 일반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모든 스위스 국민은 진정으로 평등하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또 한 번 대통령과 마주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와 스위스 간의 친선 축구 경기를 보러 간 경기장 주차장에서였다. 당시 유럽 축구팬으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차범근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였다. 또 그 분데스리가 축구팀은 몇 주 후 KAL기 편으로 스위스 취리히 공항을 거쳐, 한국을 방문키로 예정돼 있기도 했다.
주차를 막 끝내고 경기장 입구 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뮤스 프레지덩”을 외쳐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거기에는 뜻밖에도 얼마 전 만났던 대통령이 프랑스제 푸조 소형차에서 막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대통령 쪽으로 다가갔다. 대통령은 나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기도 하고, 악수도 하며 일반인과 함께 줄을 선 채, 무리 지어 경기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통령의 다정함은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평범하고, 격의 없는 소탈한 생활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대통령을 가진 스위스 국민이 무척 부러웠다. 절대 권력을 허용치 않은 그런 시스템을 만든 스위스인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애정도 함께 느껴졌다.
한마디로 그들은 제왕제나 중앙집권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각 지방으로 분권화된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 지켜가고 있는 위대한 국민이다. 국민의 반 이상이 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잘 모르고 있고 알 필요도 없다고 했다.
요즘 한국은 대통령을 둘러싼 충격적인 국정파탄 소식으로 참담한 실정이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북쪽의 공산 독재체제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선출된 왕’이나 다름없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직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다.
퇴근 후 야간 경기를 보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줄을 선 대통령 모습을 볼 수 있는 ‘동화의 나라’ 대한민국은 정말로 요원한 한낱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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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운 인랜드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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