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문한 탓인지 최근 낯선 말을 들었다. ‘심플한 책임감’이라는 말이다. 며칠 전 고국의 청와대 참모가 한 말이다. 심플한 책임감(?), 어지간해서는 정확한 어의를 알기 어려운 표현이다. 책임총리, 정치적 책임, 법적 책임 등등 요즘 ‘책임’에 대한 말을 많이 듣는다.
책임이라는 말은 대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어떤 일을 맡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를 의미한다. 어떤 직책 수행에 필요한 ‘부여받은 책임’이 있다. 또 다른 의미는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것에 대한 추궁이나 처벌을 담은 ‘제재로서의 책임’을 의미한다. 이때의 책임이란 ‘비난, 불이익 혹은 사임(辭任)이나 파면 같은 제재를 받는 것’을 뜻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책임을 진다(負)고 말한다.
그 동안 한국 사회는 공적인 영역의 책임에 대하여 그 경계가 두루뭉술한 편이었지 싶다. 공인으로서 누가 정책적 잘못을 해도 ‘부여받은 책임’을 제대로 다했는지 철저하게 책임을 묻는 편도 아니었다. 도덕적 잘못을 했거나 정책적 실패를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가혹하거나 야박하게 생각하기도 하였고, 당사자 역시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적당히 어물어물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책임의식이 흐려졌다.
사회에 ‘책임의식’이 살아나야 한다. 엄히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는 풍토가 자리 잡아야 한다. 공직자 혹은 사회적 공인의 과오는 그 폐해가 본인의 개인 신상에만 미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심각하게 부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책임 있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은 우리에게 뜻하는 바가 많다. 조선 선조시대 재상이었던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의 뼈아픈 실패 속에서 왕 혹은 관료의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고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징비록’을 기록하였다. 후세에 정치적 책임의식의 막중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꾸짖음은 물론 조정의 치부를 드러내는 마음의 고통을 감수하며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울며불며 가로막는 백성을 버리고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 갔고, 평양 사수하겠다며 백성을 안심시키고 다시 의주로 도망을 갔다. 그 후 왜란이 끝나고 왕이나 조정의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의 도돌이표는 그대로 이어져,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은 몰래 대전으로 피난 가 있으면서 방송으로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거짓 방송을 하여 국민을 기만하였고, 근 800여 명이 건너고 있던 한강대교를 폭파하여 무고한 국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하였다.
서울 탈환 후 정부는 대령 한 명을 희생물로 삼아 사형시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책임 실종과 관련하여 세월호 참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2012년 약 22조원을 들인 4대강 개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개발 이전보다 수질이 나빠졌고, 개발효과가 나오지 않고 있음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동안 한국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모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심플한 책임감’, 낯선 말이다. 국민은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그만 멈추라고 하는데, 오히려 심플한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국정에 임해야 한다는 말은 소통불가이다. 책임이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부여받은 책임을 공인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사회는 제재로서의 책임을 물어야하고, 당사자는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논어 술이편에는 ‘용지즉행(用之則行) 사지즉장(舍之則藏)’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자신을 써 주면 나를 펼쳐 보이고, 세상이 나를 버리면 물러나 조용히 숨어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새겨들을 말이다.
현재 많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부여받는 책임’을 제대로 못했으니, ‘제재로서의 책임’을 지고, 국정에서 손을 떼고 퇴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직책에 부여된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야 말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책임의 엄중성을 이렇게 말한다. “매사에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당신의 의도가 아니라, 당신의 책임이다.” 책임을 책임지는 사회, ‘책임’이 살아 있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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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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