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시작된 ‘대불황’은 우리 시대의 대공황이었다. 그 불황이 대공황으로 끝나지 않고 이 정도로 마무리된 이유의 하나는 무역 전쟁을 피했기 때문이다.
1930년 대공황으로 기업이 줄도산하면서 실업자가 속출하자 리드 스무트 연방 상원의원과 윌리스 홀리 연방 하원의원은 2만개 수입 물품에 대한 관세를 사상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스무트-홀리법’으로 불리는 이 법이 시행되자 미국민의 일자리는 일시적으로 소폭 늘어났다. 물건 수입이 줄자 대체재 생산을 위해 더 많은 근로자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렇게 피해를 입은 상대국의 보복 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고 세계는 본격적인 무역 전쟁에 돌입했으며 미국의 수출과 수입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스무트-홀리법’이 대공황을 악화시킨 주범이라는데 경제학자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다.
이번 불황에 무역 전쟁이 동반되지 않은 것은 대다수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환태평양 동반자 협정(TPP) 체결을 통해 무역량과 일자리 증대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올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물거품으로 그치게 됐다. 물거품 정도가 아니라 트럼프가 선거 공약대로 북미 자유무역 협정(NAFTA)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산 물품에 45%의 관세를 부과한다면 무역 전쟁의 발발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세계 무역 규모는 3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무역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피해도 그에 상응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30년대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다. 지금은 세계 최대 채무국이다. 오바마 집권 8년간 미 국채는 거의 2배가 늘어 19조 달러를 넘어섰다. 18조 달러로 추산되는 미 GDP의 100%가 넘는다. 이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이 지금까지 사주던 국채 매입을 중단하거나 내다 팔면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 수익률은 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 당선 후 장기 금리의 기준이 되는 10년 만기 연방 국채의 수익률은 폭등하고 있다. 올 7월 1.3% 수준이던 이 채권 수익률은 이제는 2.2%선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모기지 금리도 오르고 있다. 이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가계와 기업, 정부의 부채 상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주택과 상업용 빌딩 경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은 중서부 ‘러스트 벨트’의 백인들이다. 이들은 중국과 멕시코를 때려잡아 일자리를 돌려주겠다는 트럼프의 허황된 약속에 속아 그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물건 수입을 금지한다고 사라진 일자리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미국 노동자의 1/10 수준 임금으로 제품을 생산할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세계 모든 나라를 상대로 빗장을 내걸 것인가.
수입 봉쇄가 일자리 귀환을 약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컴퓨터와 로봇, 인공 지능의 약진에 따른 자동화 물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러드 대왕’을 추종하는 ‘러다이트’를 자처하며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방적기를 때려부쉈지만 도도한 기술 혁신의 대세를 막지는 못 했다.
세계화와 기술 혁신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아무도 거스르지 못한 거대한 흐름이다.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척화비를 세운 조선의 대원군이 그 표본이다. 미국은 이제와 그 뒤를 밟으려는가.
트럼프가 공약을 실천해 무역 전쟁이 촉발되고 금리가 올라 그나마 살아나던 부동산마저 죽는다면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그를 지지했던 중하류층 백인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다음 선거에서 등을 돌릴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로서는 퇴로가 없는 셈이다.
이번 선거 전 전문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트럼프 승리를 예측한 앨런 릭트먼 아메리컨대 교수는 트럼프 당선 후 트럼프가 임기 중 탄핵 당하거나 사임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주장 같다. 하지만 4년 전 박근혜를 지지했던 사람들 중 오늘 그녀가 이렇게 몰락하리라 짐작한 사람이 있었을까. “신이 인간을 벌하려 할 때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리스 속담이 생각난다.
<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