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정으로 한국어 신문 구독을 중지한 후, 종이신문 보던 습관 때문인지 일주일에 한 두 번 동네 도서관에 들르게 된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한국어 신문도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건강칼럼 등 특정기사가 실린 페이지가 없어진 것을 자주 보면서 예전에 본 환자 생각이 났다.
여자 대학생 A가 근심에 쌓인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A는 얼굴을 붉히며 정신과 의사의 소견이 필요하다는 대학교무처 요청서를 내밀었다. 어머니를 딴 방에서 기다리게 하고 A의 말을 들었다.
A는 엄격하고 빈틈없는 아버지로부터 항상 정숙하고 공부 잘 하는 여자가 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7살 쯤 되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고 화가 난 그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연필 한자루를 슬쩍 주머니에 넣고 집에 왔다. 처음엔 공짜로 갖게 돼 기분이 좋았는데 점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며칠 후 훔친 연필을 편의점 주인에게 돌려주며 용서를 빌었다.
그 후부터 물건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종종 생겼으나 꾹 참고 지냈다. 중학생이 되자 큰 시험이나 운동시합이 있기 전날에는 왠지 불안하고 긴장되어 무언가를 훔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동생이나 친구들 물건을 슬쩍하고 나면 긴장이 확 풀리고, 일종의 쾌감마저 들며 마음이 편해졌다. 월경 전 특히 심했던 이런 충동은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됐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A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명문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타지에 살며 집에 대한 향수, 부모의 기대와 학점으로 인한 압박감, 대학생활 적응의 어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점점 쌓여진 스트레스는 내면에 숨어있던 도벽충동을 자극하고, A는 다시 자잘한 물건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근 경비원에 걸렸는데 A가 성적도 좋고, 사회봉사 활동도 하고 있으니 처벌 대신 심리상담을 받게 하기로 학교 측은 경찰과 타협을 하였던 것이다.
어려서는 대부분 한두번 타인의 물건을 훔쳐본 경험이 있다. 프로이드가 명명한 초자아는 4-5세 전후에 완전히 형성된다고 한다. 그 뒤에는 소유개념이 뚜렷해져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정결핍이나 가정 붕괴, 또는 정신지체, 자폐증 등 생물학적, 유전적, 환경적 이유로 인해 이러한 과정이 잘 진행되지 못하면 충동적으로 타인의 소유물을 훔치는 행동을 보인다. 이렇게 도벽은 보통 어릴 때 발생하여 나이가 들며 만성화하는 경향이 높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훔친 물건들에 애정이나 관심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거나, 무의식 속 분노나 성적욕망을 방출하는 수단으로 설명한다. 물건이 문제라기보다 스트레스의 압박감, 타인의 기대감 등이 자신이 통제하는 초자아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게 주원인이다.
도벽증은 가장 오래된 정신질환 중의 하나다. 이미 200년 전에 진단명이 나왔다. 최근 미 정신질환 진단 목록에는 도박중독, 성중독, 샤핑중독 같이 충동장애의 하나로 기술되어 있지만 빈약하고 불충분한 과학적 근거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벽증은 훔치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고 훔치기 전에는 긴장감, 훔친 후에는 안도감, 쾌감, 성취감을 느낀다. 또한 심각한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지를 당하면 반복적으로 계속해야만 하는 정신질환이다.
아직 확실한 치료방법은 없다.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인지행동요법을 주로 이용한다. 가끔 잠재의식 속에 묻혀있는 도박행위의 원인을 파헤치는 정신 역동요법도 한다. 도벽증 때문에 우울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항우울제를 권한다.
도벽증은 쾌감을 주관하는 대뇌의 변연계와 충동을 억제하는 전 전두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변연계에서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오피오이드가 과량으로 방출되고, 전 전두엽에서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판단능력 장애를 보인다.
도벽증은 숨겨두면 큰 문제를 일으켜 생을 망칠 수 있다.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신질환인 만큼 미루지 말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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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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