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로 온 국민이 ‘혼이 비정상’일 정도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서울에 있었다. 낙엽 밟는 소리 사각 거리는 고즈넉한 늦가을 정취를 그리며 찾아간 고국은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였다. 모두가 말을 잃었고 모두가 말을 했다.
거리에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대학마다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인터넷에는 ‘공주전’ 같은 온갖 패러디가 홍수를 이루었다.
4일(한국시간) 대통령의 두 번째 대국민 사과 후 지지도는 더 떨어져 5%. 다양성과 다름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의 마음이 이 정도로 하나가 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연세대 학생이 썼다는 앞의 ‘공주전’은 “사상 최초로 민심을 하나로 모은 공주의 깊은 뜻을 찬탄해 마지않았다”고 세간의 분위기를 풍자했다.
미국으로 돌아오니 힐러리 클린턴 쪽으로 무게중심을 잡아가던 대선 판도는 또 한번 크게 흔들려 백중세가 되었다. 연방수사국 국장이 돌연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 발표를 하자 표심은 다시 한바탕 춤을 췄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클린턴이 한 뼘쯤 우세하기도 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오히려 우세하기도 한 결과들이 두서없이 나왔다. 클린턴을 지지하(려)던 유권자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확신이 없어서 마음이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다는 말이 된다.
조그만 자극에도 우왕좌왕하는 표심에 클린턴은 지금쯤 짜증이 나지는 않을까? 생각하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마구 막말을 쏟아내자 유권자들이 오히려 환호하는 황홀경을 맛본 트럼프는 막판 뒤집기를 위해 막말 공세의 도를 높였다. 클린턴도 트럼프도 혹시‘우중(愚衆)’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의 사태, 중상모략 인신공격 난무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가없는 거리를 생각했다. 이상으로서 민주주의는 위대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얼마나 허점이 많은가.
허점의 근원은 하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신 같이 완전하거나 인공지능처럼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판단한다면 생기지 않을 일들이 인간의 세상에서는 일어난다. 시사 조크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겸 배우 조지 칼린이 말했었다. “큰 집단을 이룬 멍청한 사람들의 힘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우중에 대한 경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처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국민들이 선출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후에도 지지율이 ‘콘크리트’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교과서 읽는 듯한 말투, 거리감 주는 눈매, 수첩, 머리 모양, 옷매무새 … 하나하나가 격조이며 기품으로 찬탄 받았다. ‘공주’였다. 이 모두가 ‘최순실 작품’이었다고 하니, 지지율은 기존 지지층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모든 유권자가 냉철한 판단력으로 가장 훌륭하고 능력 있는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 실제는 많이 다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유권자도 있고, 판단할 시간이나 관심이 없는 유권자도 있다.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요소들도 있다. 후보들의 인기 영합주의가 대표적. 유권자들의 마음을 일단 사로잡고 봐야 하니 당장 인기 있는 정책을 내놓거나 이성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선거 전략이 대세이다. 저소득 저학력 백인들의 분노,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막말로 흔들어 불타오르게 한 트럼프의 전략이다.
유권자로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또 다른 요소는 편 가르기. 석기시대의 생존본능인 부족주의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남이가~’의 의식이다. 트럼프가 싫어도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 선거운동을 하고, 클린턴이 싫어도 민주당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표를 던진다. ‘박근혜’ 이름만 들어도 몰표를 주던 과거 TK 정서이다.
거기에 흑색선전, 금품살포 등 부정선거까지 동원되면 우리 불완전한 존재, 유권자들은 헷갈린다. 그래서 ‘선출된 대통령 = 그 나라의 민도’라는 말은 설득력을 얻는다.
선거가 코앞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한몫하기를 바란다. ‘멍청한 다수’가 결정하는 나라를 맞지 않으려면, 각자 판단력 갖추고 투표에 임해야 한다. 앞으로 4년, 어떤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은가.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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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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