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에서는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나무장대 위에 새 조각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새에는 주로 오리가 선택됐다. 한민족의 조상인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의 북방 민족은 오리를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겨울철 혹독한 날씨에도 먼 거리를 거뜬히 이동하는 오리의 강건함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물 위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오리의 적응력에 감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과 물은 몰라도 땅 위를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하다. 멀쩡한 오리도 그런데 하물며 한쪽 다리를 다친 오리야 오죽 하겠는가. 18세기 영국에서 빚을 못 갚아 재산을 차압당할 위기에 놓인 브로커를 지칭하던 ‘레임 덕’(lame duck)은 19세기 미국에서 선거에 져 권력을 잃은 후 남은 임기 동안 힘없이 앉아 있는 정치인을 뜻하는 말이 됐다. 미국 대선은 11월에 치러지지만 원래 취임식은 다음 해 3월에 거행됐다. 선거에 진 현직 대통령이 4개월 동안 ‘레임 덕’ 신세로 지내는 것을 막기 위해 1월 20일 취임하는 것을 골자로 한 수정 헌법 20조가 1933년 만들어졌다.
한국은 요즘 ‘최순실 게이트’와 함께 국정 공백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5년 단임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 대통령은 집권 4년 차가 되면 사실상 힘을 잃는다.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정치판은 현직 대통령보다 차기 대통령이 누구냐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가뜩이나 지난 4월 총선에서 힘을 잃은 박근혜는 이번 최순실 사건이 터지면서 ‘절름발이 오리’가 아니라 ‘죽은 오리’ 신세로 전락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측근 비리가 아니라 박근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데 있다. 아무리 친하다고 연설문을 비롯한 국가 기밀을 사인에게 보여주고 그 개인이 정부 인사와 예산을 좌지우지 하는가 하면 그 위세를 이용해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이 사건은 이 일을 저지른 보좌관과 방치한 각료들을 해임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이런 행위가 박근혜의 지시나 묵인 없이 이뤄졌다고 믿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드문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인물이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총탄에 잃고 혼자 고립돼 18년의 세월을 보냈다. 권력의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경험이 있고 자신이 잘 나갈 때 온갖 아부를 하던 사람들이 권력을 잃자 어떻게 돌변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이다. 박근혜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어려웠을 때 한결 같이 의리를 지켜준 사람만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것을 배신과 의리의 잣대로 재는 박근혜 마인드가 오늘의 비극을 불러온 단초로 볼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권력 말기와 퇴임 후가 행복했던 한국 대통령은 하나도 없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장기 집권과 독재를 일삼다 쫓겨나 하와이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고 윤보선은 5.16 군사 쿠데타를 방조하다 말년을 가택연금 상태에서 보냈다. 이승만보다 더 길고 가혹한 장기 집권과 철권통치를 펴던 박정희는 결국 총에 맞았고 전두환과 노태우 모두 퇴임 후 감옥에 다녀왔다. 김영삼은 아들이 감옥에 간 후 자살을 기도하는 모습을 봐야 했고 김대중은 ‘홍삼 트리오’라고 불리는 세 아들이 모두 기소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노무현은 가족 비리로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명박은 임기 말 형과 멘토, 보좌관들이 모조리 잡혀가는 수모를 겪었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은 이들에게는 비극이지만 한국 전체로 보면 희망일 수 있다. 그들의 불행은 자신이나 측근들이 자초한 것이며 비극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만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정치판이 전보다 조금 깨끗해진 것은 오랜 세월 한국 국민들이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지만 한국민은 4.19와 5.16, 5.17과 6월 항쟁 같은 위기도 결국 극복해내고 여기까지 왔다. 국민과 여야 정치인 모두 힘을 모아 이 사태를 한국 정치판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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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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