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신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조카 효주의 손을 잡는다. 웨딩마치에 맞춰 환한 교회당 식장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데이지 꽃바구니를 들고 활짝 웃는 신부가 학 같이 곱다. 하객들이 모두 일어나 축복의 환호를 보낸다. 동화 속 기사처럼 듬직한 신랑이 단 아래서 들러리들을 거느리고 신부를 맞는다. 신랑의 선한 눈매가 꼭 매제를 닮았다.
매제가 병으로 소천한지도 5년이 지났다. ROTC 2년 후배였던 그는 오래 전 여동생과 결혼 때 내 앞에서 척 경례부터 올려붙였다. “충성! 조국의 간성으로 선배님의 가족에 합류함을 신고합니다”했는데 맏딸 출가도 못보고 먼저 갔다. 오늘 그가 자기를 닮은 사위를 보았으면 얼마나 흐뭇해했을까?효주가 대학에 들 무렵, 맏딸 사랑이 지극했던 매제가 느닷없이 한마디 했었다. “형님, 오동나무를 심어야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텃밭에 오동을 심었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딸이 나이가 찰 때면 큰 나무로 자란다. 딸이 정혼을 하면 아버지는 서둘러 오동을 베어서 시집에 보낼 장롱을 만들었다. 오동은 가볍고 무늬 결도 곱고 벌레도 먹지 않아 악기나 고급가구의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골동품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보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글에 보니, 오동을 심는 부모의 마음에는 이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오동은 봉황이 깃드는 상서로운 나무란 것이다. 봉황은 상상 속의 길조로 수컷은 ‘봉’, 암컷은 ‘황’으로 불렀다.
봉황은 자웅사이가 좋아 부부애를 상징한다. 베개에 봉황을 수놓은 것도 이들의 사랑을 본받으려는 의도다. 그러니 딸의 아버지가 오동을 심는 뜻은 천생연분 ‘봉’을 기다리는 ‘황의 아비’의 마음, 즉 좋은 사위를 맞으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키운 오동나무는 딸의 혼처가 정해지면 가차 없이 잘라낸다. 혼수를 빨리 만들려는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봉’이 내려앉지 못하도록 내리는 ‘황의 아비’의 결단이란 것이다.
생각하면 효주가 천생연분을 만난 것도 제 아비 덕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 와서 쉴 틈 없이 일만 하던 매제가 갑자기 병을 얻었다. 몇 번의 큰 수술을 하며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었는데 갓 중학생인 효주는 늘 아빠 곁에서 통역을 했다.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싫은 기색 한번 없이 아빠를 도왔다. 사전을 들춰가며 아빠의 증세를 의료진에게 설명하고, 고통을 참는 아빠의 손을 잡고 시편을 읽어 드렸다.
그러나 너무 어린 시절부터 아빠가 피를 쏟는 응급수술을 몇 차례씩 받는 걸 지켜보면서 효주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사랑하는 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병과 죽음의 냉혹함, 그리고 왜 나만 이런 불행을 겪어야 되는가 하는 자괴감, 누구에게 인지도 모를 원망때문인지도 모른다.
구급차의 사이렌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불안한 증세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 수술실 앞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는데 아무도 그 여린 마음에 깃든 트라우마를 짐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아빠를 간호하며 커 가는 효주를 눈여겨 본 교회 어른들이 계셨다. 훗날, 그들 중 한 분이 지인의 아들인 젊은 의사를 소개한 것이다. 그 청년의사는 효주의 효심과 할머니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아끼는 사랑 속에서 자란 데 감동했노라며 청혼을 했다. 아버지 기일 날 산소 앞에서였다고 한다. 시련가운데 임하신 하늘의 축복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신부는 결혼 만찬에서 아빠가 좋아하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피아노로 친다. 앞으로 효주의 마음속에 고인 상처들이 새 가정을 통해 조금씩 치유될 것이란 희망이 느껴진다. 나는 벅찬 마음을 누르고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듬직한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활짝 웃는 매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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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환경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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