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혐오스러워도’ 두 눈 질끈 감고 도널드 트럼프를 찍겠다는 전·현직 공화당 리더들이 상당수다. 그중 한 명이 존 베이너 전 연방하원의장이다. 트럼프 지지층이 그토록 증오하는 워싱턴 기성정치의 전형에 속하는 그는 최근 퇴임 1년여만에 처음 가진 TV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성추문에 질색하며 왜 많은 미국인들이 혐오스럽게 여기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트럼프를 찍겠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자신과 껄끄러웠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나 자신이 ‘악마의 화신’이라고 욕하며 싫어했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과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표를 결집시키고 있는가. “연방대법원”이라고 시사매거진 ‘애틀랜틱’은 단언한다.
경제에서 안보까지 수많은 서로 다른 정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힐러리냐, 트럼프냐,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가장 가시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연방대법원이다.
지난 2월 사망한 강경보수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채 10월 초 보수파 4명과 진보파 4명의 양분된 상태로 2016년 새 회기를 시작한 연방대법원은 지금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역사적인 변화의 문턱에 서 있다.
1968년 이후 어떤 대선도 금년처럼 연방대법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차기 대통령은 스칼리아의 후임뿐이 아니라 종신직인 대법관을 많으면 3명 더, 총 4명이나 지명할 수 있게 된다. 대법관의 평균 은퇴연령은 78세라는데 83세 루스 긴즈버그, 80세 앤소니 케네디, 78세 스티븐 브레이어 등 고령의 대법관이 3명이나 더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대법원 변화의 기회를 가졌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리처드 닉슨이었다. 루즈벨트는 8명, 닉슨은 4명의 대법관을 임기 중 지명하여 각각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대법원의 이념지형을 뒤바꿀 수 있었다. 이처럼 연방대법관 지명은 “어떤 대통령에게도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유산의 하나”로 꼽혀 왔다. 금년 선거도 마찬가지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대법원은 스칼리아 사망 이전 5대4의 보수 성향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진보파인 긴즈버그와 브레이어가 그의 임기 중 은퇴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대법원’은 7대2의 절대보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여성의 낙태권과 소수계의 인권이 다시 위협받는 불안의 시대가 앞으로 수 십 년, 트럼프 행정부와 트럼프 개인의 수명이 다한 후까지도 계속된다는 의미다.
대대적인 지각변동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과 함께 올 것이다. 베트남전쟁 이후 첫 진보 대법원의 출범을 예고한다. 스칼리아의 후임을 지명한 후, 보수파인 케네디가 은퇴할 경우 6대3으로 진보성향을 강화할 수 있다. 첫 여성대통령 탄생으로 백악관의 유리천장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연방대법원의 대리석바닥도 흔들릴 것이다.
요즘의 대법원은 예전의 대법원이 아니다. 정치적 비중이 커지고 있다. 양극화로 인한 의회의 교착상태가 악화되면서 많은 주요 이슈의 해결책이 입법화되지 못한 채 사법부의 판결로 결정되고 있어서다. 힐러리와 트럼프, 누가 백악관에 들어가도 초당적 입법을 실현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이민, 총기규제, 헬스케어, 동성결혼, 투표권, 낙태권, 근로자의 권리, 소수계의 권리 등 온갖 이슈의 최종 결정이 대법원에서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자주 이루어지고 있으니 양당 모두 금년처럼 흔치않은 기회가 왔을 때 대법원을 장악해야 한다.
더 절박한 것은 공화당이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이념색채 강한 ‘운동권 사법부’를 비난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인구변화가 계속 더 젊고 다양하게, 친민주당으로 바뀌면서 입법부와 행정부에서의 파워가 약화된 공화당이 기댈 곳은 대법원뿐이다. 그러므로 공화당에게 보수대법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할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고 애틀랜틱지는 분석한다.
섹스 스캔들과 이메일 스캔들에 밀려있던 ‘연방대법원’이 공식 이슈로 등장한 것은 지난주 3차 후보토론에서였다. 진행자가 물었다 : “연방대법원이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가기를 원하는가? 헌법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건국의 아버지들의 어구는 글자 그대로를 의미하는가? 변하는 환경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야하는 살아있는 문건인가?”
힐러리는 “대법원은 막강한 기업이나 부유층의 편이 아닌 미국민의 편에 서야한다”고 강조한 후 낙태의 권리, 투표의 권리, 여성의 권리, 근로자의 권리, 소수계의 권리 보호를 지지하며 드리머들을 불안에서 구제하고 돈 선거를 허용한 선거자금 판결을 번복시킬 대법관 지명을 약속했다.
이미 자신의 대법관 후보군 명단을 발표한 바 있는 트럼프는 ‘위험에 처해 있는’ 총기소유권 보호와 낙태권 제한을 재천명하면서 확실한 보수 대법관을 지명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보수대법원’은 사분오열된 공화표밭 결집의 마지막 희망이 될 만큼 보수진영에는 절대적 사안이다. 중요하기는 진보진영에도 다르지 않다. 여성과 소수민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어쩌면 우리 생전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될 수도 있다.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앞으로 수 십 년 소수민의 평등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연방대법원’이 금년의 우리 한 표 한 표로 결정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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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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