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 되면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그해의 한국사회를 한마디로 축약한 사자성어를 골라 발표하는데 지난 해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였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일컫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에서 한자씩 따오고, 세상이 어지러워 도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음을 꼬집은 논어의 ‘천하무도’(天下無道)에서 두 글자를 따 온 것이다. 군주가 어리석으면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인데 2015년은 메르스 사태와 국정교과서 논란, 유승민 파동 등으로 온 나라가 일 년 내내 시끄러웠던 때였다.
그런데 요즘 한국사회, 특히 권부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혼용무도’는 2015년만이 아닌, 박근혜 정권 전 기간을 관통하는 사자성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14년 ‘정윤회 파동’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더니 또 다시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온 나라가 블랙홀에 빠진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자신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최순실씨로부터 홍보물과 연설문 도움을 받아왔다고 밝혀 그동안 제기돼 온 의혹들을 사실상 시인했다. 1차 논란의 장본인이었던 정윤회와, 이번 논란의 중심인물인 최순실은 얼마 전까지 부부였다. 두 사람 모두 박 대통령과는 오랜 세월 ‘특수 관계’에 있었던, 하지만 단 한 번도 공직을 맡아 본적 없는 민간인들이다.
2014년 말 정윤회 파동과 관련해 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수사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3위”라고 말해 화제가 됐었다. 황당 발언으로 치부됐던 그의 진술은 점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민간인인 최순실이 주도하는 재단설립 작업에 정부부처가 군사작전 하듯 나서고,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수백억원을 갖다 바칠 수는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력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권력이 큰 만큼 사용에는 그에 걸 맞는 신중함과 현명함이 뒤따라야 한다. 자칫 어리석은 대통령의 손에 이것이 쥐어질 경우 그 결과는 비선측근들의 발호와 나라의 어지러움으로 나타난다. ‘혼용무도’를 2015년의 사자성어로 고른 교수들이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점차 ‘박근혜 게이트’로 확산되고 있는 비선실세 게이트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절대군주시대의 환관정치를 연상시키는 권부의 이런 행태는 나라의 역량을 좀 먹고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말 한마디, 눈짓 한 번에 찍소리 못하고 거액을 헌납하는 재벌기업 문화가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 갤럭시 노트7 단종 같은 참사는 우연히 발생하는 게 아니다.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와 기업의 문화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인사 참사, 재난대처 부실, 비선실세 스캔들 등이 터져 나올 때마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일 없다” “모르는 일이다” “아무런 문제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해 왔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일관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드러내 왔다. 스캔들과 비리의 악취가 진동하는 데도 그들만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렇다면 진짜 심각한 축농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몸과 세상사의 이치는 많이 닮아 있다. 우리 몸이 냄새 맡는 능력을 잃어 버렸다면 그것은 인식에 장애가 생기고 판단력에 문제가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박근혜 정권의 ‘혼용무도’와 심각한 ‘축농증’ 증세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박대통령은 선친의 후광 덕에 막대한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혼용무도’가 지속되면서 물려받은 것을 거의 다 까먹었다. 지지율은 완전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다.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의 철학이 빈곤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개념이 없을 줄은 몰랐다. 가장 기본적인 공사 구분조차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현재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방법은 단 하나, 게이트의 진상을 숨김없이 밝혀 악취의 원천을 도려내고 자숙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난데없이 들고 나온 개헌 카드는 국면전환용이었음이 명백해졌다. 대통령은 개헌에 대해 줄곧 부정적이었다. 역시 ‘손바닥 뒤집기’의 여왕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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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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