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 꿈을 꾸는 때가 있다. 이게 꿈이지, 알면서 깨어나려고 애쓰다 드디어 깨어 났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다시 또 다른 한 켜의 꿈 속. 꿈 속의 꿈은 벗겨도 벗겨도 또 벗겨야 하는 양파 같다.
해가 바뀔 때마다,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이게 꿈이지 싶다. 어렸을 때 챨튼 헤스톤이 나오는 영화 십계를 본 기억이 난다. 이집트 왕실의 왕자 신분으로 살던 중 같은 핏줄의 유대인이 학대 받는 걸 목격하고 분개한 그는 이집트 병사를 살해하고 달아난다. 달아난 몸으로 같은 동족의 여자와 결혼을 하고 양치기로 살던 중 떨기 나무 덤불에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번엔 지팡이 하나들고 이집트 왕과 담판지러 도망쳐 나온 이집트를 향해 다시 떠난다.
왕자로 살던 시절 모세를 사랑하던 공주와 모세의 아내로 살던 여자가 훗날 만나게 되는데 아직도 모세에 대한 사랑으로 맘 아파하는 공주에게 모세의 아내가 담담히 말한다. ‘그가 자신의 혈육을 찾았을 때 당신은 그를 잃었고 그가 자신의 하느님을 만났을 땐 내가 그를 잃었지요.’ 그 영화를 본게 십대 초 였는데 그 후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대사가 생생히 귀에 들려온다.
저 자리에 가고 싶어 맹목적으로 달렸는데 그 자리에 와 보니 정작 내가 바라던 그 곳이 기대하던 그것이 아닌 순간, 이것을 갖기 위해 살았건만 저것을 놓지 않으면 이것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 살면서 느끼는 허기란 그런 거 였나?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손을 가진 마이다스 왕이 배가 고파 움켜쥔 빵 한조각이 황금으로 변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이 그랬을 것 같다. 한 겹의 꿈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한겹의 꿈 속으로 들어서듯, 하나를 얻게 되면 하나를 놓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면 그동안 중독되었던 세상 재미와 헤어지게 될까봐 아쉬워 절대로 안믿겠다고, 그러나 혹 믿게 되면 죽기 바로 직전에 믿겠다고들 한다. 그래놓고 어찌어찌 하다 밑바닥을 친 후 종교를 갖게 되면 이제껏의 삶이 모두 헛거였다고 진작 하루래도 빨리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하고 무릎을 치며 아쉬워 한다.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소유하고 싶어 했던 모든 게 말짱 헛것이 되는 순간이다.
햇살 아래 새로운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붙잡을 가치가 있는 게 무엇일까? 최근 오랜 지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알고 지냈어서 그 세월속에서 변한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우리 기억력의 한계에 대해 킬킬 웃다가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생생히 생각나는 어렸을 때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에게 강렬하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너무도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과 너무도 일치해 깜짝 놀랐다. ‘애들이 땅에 금을 그어놓고 사방치기를 하고 있었어요. 나도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고요. 근데 한 순간 햇살이 너무나 빛나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런데 그 때는 길 옆 하수구로 물이 흘렀잖아요. 그 물 흐르는 소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 없는 거예요.’ 나도 서너살 때 아침 일찍, 그렇게 이른 시간인줄도 모르고 집 앞에 나온 적이 있다.
거리는 텅 비어있고 나는 쓸쓸한 마음으로 축대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 동녁에 뜨는 햇살이 받고 있었다. 그러다 한 순간 마치 금가루 은가루가 하늘에서 뿌려지듯 햇살이 황홀하게 빛났다. 발 밑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천상의 소리처럼 가슴 벅차게 아름답고 온 세상이 잠깐 나를 위해 걸음을 멈추고 환성을 올리는듯 했다. 설명이 되어질 수 없이 너무도 황홀한 경험이었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한 채 살면서 힘겨울 때마다 나는 그 자리, 그 시간으로 돌아가 위로 받고 쉴수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묻는다면 그런 순간 덕분에 산다고 답할 수 있으려나. 초현실적인, 설명되어질 수 없는, 화폐나 지위로 살수 없는, 자연이 주는 무욕과 초탈만이 참된 삶의 가치인게 아닐까 싶다. 가을, 햇살, 물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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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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