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영화계는 일제 전성시대다. 작년에 나온 ‘암살’이 천만 관객을 넘어서며 돌풍을 일으키더니 올해는 ‘밀정’이 개봉 한 달 만에 700만을 넘어 섰다. 이밖에 속고 속이는 사기꾼들의 행각을 그린 ‘아가씨’,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등등이 모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영화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밀정’이다. 이 영화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반도인들의 고통을 나름 깊이 있게 그려 보려 애쓰고 있다.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식민지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둘뿐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거나 아니면 일제와 싸우며 독립을 되찾는데 목숨을 거는 길이었다. 이중 항일과 독립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외교 노선 주창자다. 열강과의 외교 협상을 통해 조선의 자주 독립을 얻어낸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경제적 자립을 바탕으로 정치적 독립을 얻어낸다는 안창호 류다. 셋째는 조선의 독립은 오로지 무장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열단 창립자 김원봉 파다.
이중 첫째와 둘째는 희망사항에 가까운 주장이다. 이승만이 주요 활동 무대로 삼은 미국은 조선이 독립국일 때에도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인정받는 대신 조선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해준 적이 있다. 그런 미국이 망명중인 노정객의 말만 듣고 조선을 일본에서 독립시켜 준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다.
경제를 발전시켜 힘을 키운 후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 독립을 요구한다는 발상도 비슷하다. 경제 성장으로 부가 창출된 식민지를 일본이 자진해서 내 줄 리가 없다.
일본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조선이 독립을 다시 찾으려면 무력으로 일본에 맞서 굴복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현실을 정확히 본 것이지만 불행히도 1910년 이후 일본의 국력은 조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졌다. 일본은 이미 1895년 청국에, 1905년에는 러시아에게 통렬한 패배를 안겨줬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창립된 이래 조선 총독부 등 주요 기관에 대한 공격과 친일파 거물 등 처단을 목표로 1920년 부산 경찰서장 폭사, 1921년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 1923년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1924년 친일파 사살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수많은 실패의 기록도 있다. 1922년 육군 대장 암살 기도 실패,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불발, 1924년 이토 히로부미 수양딸 암살 기도 실패, 1924년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불발 등등. 이처럼 잇단 실패와 일제의 탄압으로 한 때 1,000명이 넘던 의열단원 수는 급속히 줄어들며 1928년 해체되고 만다.
영화 ‘밀정’은 이 의열단 단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로 1923년 이들이 조선 총독부 등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폭탄을 밀반입하는 것을 도운 조선인 경부 황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황옥은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여 경부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죄책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무기 밀반입 작전은 내부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황옥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대부분 체포된다. 이 때 재판정에서 황옥은 자신은 의열단을 소탕하기 위해 위장 잠입했다고 주장하나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 후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과 재수감을 거듭하다 해방 후 이북으로 끌려가는데 그가 과연 밀정이었는지 독립 투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의열단의 테러가 한 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한국 독립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의열단이 오래 가지 못한 것도 영화 ‘밀정’에서 배신자가 말한 것처럼 거듭된 실패로 많은 단원들이 테러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과대망상증에 빠져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하지만 않았어도 미국은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용인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더라면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친일파를 엄단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도 독립을 우리 손으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정’을 보면 좋은 선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던 세월을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고통이 새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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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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